내일 이기기 위해 지휘관은 오늘 싸워야 한다 > 나의산책

본문 바로가기

System Club 지만원

나의산책 목록

내일 이기기 위해 지휘관은 오늘 싸워야 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14 조회10,904회 댓글0건

본문

 

           

보병 제1대대에 인기 높은 소대장이 있었다. 꾀 많고, 재치 있고, 사교성도 좋고, IQ도 높았다. 농구나 배구를 할 때면 순발력이 뛰어나 무엇이든 못할 게 없는 유능한 청년으로 보였다. 그가 소대원을 이끌고 매복을 나갔다. 어스름한 초저녁에 둑을 따라 행군을 했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하얀 색 둑이 광활한 평야를 두 조각으로 가르고 있었다. 길과 나란히 흙탕물이 흐르는 수로가 길게 뻗어나갔고, 양쪽으로 전개된 광활한 평야에는 벼가 검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맨 앞에서 행군하는 향도에게 스타라이트스코프라는 야시장비가 지급됐다. 별빛이나 반딧불만 있어도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최신의 야간 망원경이었다. 망원경을 든 향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불과 300미터 전방에서 중무장을 한 수십 명의 베트콩 부대가 마주보고 행군해 오는 것을 본 것이다. 불과 5~6분이면 좁은 둑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군 소대는 베트콩을  먼저 발견했지만 베트콩들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천진하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한다면 누가 이겼어야 하는가? 당연히 한국군 소대가 이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영리했던 소대장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여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바보짓을 했다. 길에서 불과 10m 떨어진 논 가운데 경주 고분만큼 큰 사이즈의 흙더미가 하나 솟아 있었다. 소대장은 그 좁은 포인트로 30명의 소대원을 몰아넣고, 둑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는  베트콩부대에 총격을 가하도록 조치했다. 베트콩은 삽시간에 기다란 둑 뒤에 엎드려 좁은 돌출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한국군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베트콩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달아났고, 10여 명 이상의 한국군 병사만 절단났다. 유능한 소대장, 과학 장비로 무장된 군사력, 적보다 먼저 보았다는 결정적인 장점을 가지고도 이렇듯 바보짓을 할 수 있을까? ‘항재전장!’ 옛날 1960년대에 군에 유행되던 말이었다. 항상 전장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단상에 오른 높은 지휘관들은 누구나 연설문에 이 ‘항재전장’이라는 단어를 유행어처럼 사용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마음은 항상 전쟁터에 두고 전투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면서 자란 장교들은 매일 매일 전쟁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 입으로만 ‘항재전장’이었고, 마음에는 ‘전투의 승패는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닥쳐봐야 아는 것이고, 전투는 운이다’ 이런 생각들이 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우 희귀하게도 내가 속했던 중대에는 ‘항재전장'을 병사들에게 생활화시킨 이름 없는 보병 소대장이 있었다. 왜소할 정도로 체구가 작고, 사관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으며, 주위로부터 이렇다 할 인기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전투에 나가 항상 이겼다. 내가 속했던 제28연대에서 그의 전과를 따라갈 소대장은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항상 이길 수 있었을까? 그는 틈만 나면 병사들을 인근 모래밭으로 데리고 나갔다. 모래 위에 전투지역 모형을 만들어 놓고, 병사들에게 가상 상황을 생각해 내게 했다. 병사들은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열심히 생각해냈고,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냈다. 이것이 습관화되자 병사들에겐 휴식시간에도 그런 가상 상황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병사들 모두에게 상상력과 임기응변 능력이 길러졌고 이로 인해 병사들은 위기상황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앞에서 패했던 소대장이 이런 생활을 했더라면 그는 이처럼 허무하게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투 잘하는 최소위(가운데) 좌측이 필자


내일의 전투에 이기기 위해 지휘관은 오늘 싸워야 한다. 내일의 싸움은 지휘관이 오늘 무엇을 생각하고 준비했느냐에 의해 이미 판가름 나 있다. 내일의 전투는 오늘의 준비를 실현해 보이는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위의 최소위는 항상 오늘 싸운 것이다. 군 지휘관들은 “결과는 싸워봐야 안다”는 말들을 한다. 이는 전적으로 틀린 말이며 게으른 자의 변이며 부하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무책임한 사람들의 변이다. 전투는 병사들의 훈련된 직관과 몸놀림으로 하는 것이지 현장에서 일일이 소대장장이 소리쳐서 하는 게 아니다. 현장에서의 전투행위를 장교가 일일이 지휘하는 전투는 백전백패한다. 전투는 시스템과 시스템의 우열을 판가름하는 과정이다. 소리치는 지휘관이 이기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초라해 보이는 소대장처럼 평소에 훌륭한 시스템을 가꾼 장교가 승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교훈을 터득한 장교들은 별로 많지 않아 보였다. 수많은 장교들이 자기들의 신체적 자신감과 그릇된 영웅심만 가지고 철저한 준비와 시스템 없이 병사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는 부하를 살육하는 행위였다.


공수특전대에서 체력을 연마하고 사명감을 길렀다는 대위가 수색중대장이 됐다. 2개 소대만을 이끌고 깊고 깊은 산 속으로 수색 작전을 나갔다. 나는 3중대에서 숙식을 했지만 그 대위가 이끄는 수색중대를 지원하러 나갔다. 중대장은 평지를 걷는 것이 유쾌한 듯 내게 많은 자랑을 했다. “어이, 지소위, 내 팔뚝 좀 만져봐, 딱딱하지? 내 허벅지 좀 만져봐, 돌 같지? 이거 대관령에서 스키 타면서 단련시킨 몸이야. 어디, 지소위 팔뚝 좀 만져보자. 에게, 요렇게 말랑말랑한 팔뚝을 가지고 뭐 연애 한번 제대로 하겠냐?” “중대장님, 애인 많으세요?” “그놈의 시간이 있어야지, 안 그래도 고국에 돌아가면 애인 많이 만들 거다.” 물살이 거센 개울을 밧줄로 건너기도 했고, 가슴까지 차는 개펄 속을 헤치기도 하면서 며칠 동안 행군을 했다. 덕지덕지, 검은 개펄 흙이 묻은 작업복을 입은 채 태고의 기운이 물씬거리는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중대본부에서 지도를 가지고 행군하는 경로를 꼼꼼히 챙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어이, 지소위, 지소위만 믿는다. 여기가 지도에서 어디쯤이야?” 3일 만에 정글 산 뾰족한 정상에 이르렀다. 직경 3m 가량의 네이팜탄의 분화구가 산 정상에 패어있었다. 분화구 밑바닥에 맨발 자국이 보였다. 물기가 촉촉이 배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금방 지나간 자국이었다. ‘금방 이곳을 빠져나갔다면 우리가 접근해 오는 걸 보고 부랴부랴 피한 게 아닐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중대장은 태평이었다. 제1소대장이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지 소위님, 저기 저 봉우리를 보십시오. 월맹 정규군이 중무장을 하고 두 갈래로 내려옵니다. 완전 포윕니다. 큰일 났습니다. 어떻게 하지요?”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니까 소대장은 중대장보다 내게 먼저 의지했다. “빨리 사주 경계부터 하시지요. 나무 뒤와 돌 뒤를 하나씩 차지하고, 전투는 1소대장님이 챙기십시오. 절대 총을 먼저 쏘지 마십시오.”


이미 월맹 정규군 100여 명 정도에게 포위돼 있었다. 병사들은 눈만 반짝이면서 바위틈이나 거목들의 뒷부분을 하나씩 차지하고 숨을 죽인 채, 다가오는 적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게 서있는 중대장의 딴딴한 팔뚝을 잡아채 가지고 분화구 속으로 몸을 낮췄다. “중대장님, 빨리 연대장님께 상황보고를 하십시오.” “연, 연대장님, 중대는 포위되었습니다. 저는 보고 드렸습니다. 구해주십시오. 이상입니다.” 중대장의 얼굴이 사색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두서가 없었다. 연대장이 답답해했다. “야, 이 병신 같은 놈아! 너 내려오면 권총으로 쏴 죽일 꺼다. 제대로 보고 좀 해봐.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거야.” 수화기에서 울려 퍼지는 화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산을 울리는 듯 했다. 중대장은 수화기를 떨어뜨린 채, 정신 나간 사람이 돼 버렸다. 배배 꼬인 검은 줄에 매달린 수화기에서는 연대장의 질타 소리가 계속됐다. 어찌나 크게 울리는지 월맹군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수화기를 몸에 밀착시켜 소리부터 막았다. 그리고 지도 위에 몇 개의 좌표를 찍은 후에 속삭이는 소리로 연대장에게 보고했다. “연대장님, 지소위입니다.” “오, 그래그래, 어서 말해보라.” “중대는 좌표 어디에서 월맹군 정규군에게 포위됐습니다. 중무장한 병력 100명 정도입니다. 여기는 큰 바위와 큰 나무들이 많습니다. 모두 바위 뒤에 숨어 있습니다. 개할지 같으면 먼저 쏘아보겠는데 여기는 바위산이라 수적으로 불리합니다. 여섯 개 지점을 불러드릴 테니 거기에 포병 사격을 해주시고, 곧이어 무장 헬기를 보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주십시오. 월맹군이 머리를 들지 못할 때를 기해 포위망을 빠져나가겠습니다.” “오, 지소위 알았다. 즉시 하겠다. 건투하라.”


곧 이어 째지듯 작렬하는 포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나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는 1소대장에게 밑으로 내려 뛰라고 눈짓을 했다. 병사들이 민첩하게 뛰었다. 첩첩 산 속인데도 시골의 신작로처럼 넓은 길이 나 있었다. 맨 뒤에서 따라오는 병사가 제일 무서웠을 것이다. 길가엔 엎드려 마셔보고 싶을 만큼 맑은 샘물이 있었다. 정글 속의 어둠은 서서히 오는 게 아니라 카메라의 셔터처럼 갑자기 드리워졌다. 나는 대열의 가운데서 내려 뛰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적의 소굴에서 적이 다니던 길을 따라 달리다가는 베트콩 소굴로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전달, 무조건 좌측으로 틀어라.” 이내 병사들이 바위틈 사이로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낮에 이런 바위틈을 미끄러지라고 했다면 모두가 망설였을 것이다. 드디어 잣송이에 잣이 박혀 있듯이 바위틈 사이에 병사들이 하나씩 박혀 있게 되었다.


나는 또 생각했다. ‘여기는 월맹군 소굴이다. 베트콩은 우리가 어디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없다는 걸 인식시켜 줘야 한다. 우리 가까이에 포를 쏘면 그들은 우리가 여기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포대에 있는 동기생에게 부탁했다. 그는 155밀리 포대에서 귀국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다. 그는 틈틈이 나를 위로하며 밤새내 포를 쏘아주었다. 매 5분 단위로 포탄이 작렬했다. 귀를 찢듯이! 한 병사가 내게 기어왔다. “소대장님, 포탄이 너무 가까이 떨어져 파편이 날아옵니다.” 포탄이 내는 섬광을 보고 시계를 체크해보니 3초 후에 작렬 음이 들렸다. 소리는 1초에 340m를 가기 때문에 포탄이 작렬하는 곳은 우리로부터 1㎞ 떨어진 곳이었다. “야, 임마, 섬광과 소리 사이에 몇 분이 지나는지 네가 한번 체크해봐.” 그제야 병사는 안심을 했다. 밤에 작렬하는 포탄으로부터 병사들은 얼마나 큰 심리적 압박을 받는가? 이 병사 덕택에 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터득했다. 포병의 위력은 물리적인 파괴력보다 바로 이런 심리적 공포감을 주는 데 있다는 사실을! 이는 훗날 내가 다시 두 번째로 월남에 파견되어 포대장 직을 수행할 때 병사들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었던 마술의 원천이 됐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대표자 : 지만원 | Tel : 02-595-2563 | Fax : 02-595-2594
E-mail : j-m-y8282@hanmail.net / jmw327@gmail.com
Copyright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All rights reserved.  [ 관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