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가르던 거대한 구렁이의 신선한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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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19 조회11,8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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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평야에 해발 20m 높이의 분묘처럼 생긴 독립 고지 하나가 있었다. 2개 소대 병력이 간신히 진을 칠 수 있을 만큼 작았으며, 나무 한 그루 없는 빨간 점토 흙으로 이뤄진 고지였다. 산의 북쪽에는 모래 반, 물 반인 강이 100m 정도의 넓은 폭을 차지하면서 S자 형으로 형성돼 있었고, 그 뒤로는 검푸른 정글 산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고지의 남쪽에는 광활한 논이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평원에는 잘 정리된 농수로가 바둑판처럼 그어져 있었고, 그 농수로에는 뿌연 색의 물이 풍부하게 흘렀다. 중대장이 2개 소대의 병력을 이끌고 이 외로운 고지에서 3일 밤을 지내게 되었다. 굵은 물방울을 순식간에 쏟아 붓는 열대성 소나기가 막 지나간 후라 발을 옮길 때마다 군화에는 붉은 진흙이 찰떡같이 달라붙었다. 병사들마다 고양이가 뒷발질하듯이 발을 털어 보지만 그렇게 해서 떨어질 흙이 아니었다. 그런 진흙 속에 개인호를 파고 그 위에 카키색 개인용 텐트를 쳤다. 이렇게 쳐진 텐트 속에서 열대의 살인적인 더위를 견딘다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견딜 수 없이 더운 대낮이었지만 잠은 마구 쏟아졌다. 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중에도 살인적인 더위에 의해 온몸이 땀에 젖는다. 젖은 러닝셔츠와 팬티를 그냥 입고 있으면 땀이 나오자마자 저절로 말랐고, 그런 과정에서 소금가루가 조금씩 쌓여갔다. 그래서 병사들은 소금 알을 자주 먹었다. 나는 낮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에 접어놓았던 바지를 툭툭 털어 입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강이를 면도칼로 긋는 것 같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 왔다. 반사적으로 바짓가랑이를 다리에서 뜨게 한 후 흔들었더니 새까만 연탄색깔을 띈 전갈 한 마리가 떨어져 나왔다. 온몸이 오싹했다. 이것에 쏘이면 독사에 물린 것 이상으로 생명이 위독해진다. 원체 독성이 빨리 퍼져서 헬리콥터에 실려 가도 생명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 전갈은 병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됐다. 병사들이 몰려와 나뭇가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놀렸더니 전갈이 다리를 치켜들고 대들 기세였다. 전갈의 공격 자세에 화가 난 병사들이 발화성이 강한 모기약을 뿌리고 성냥을 그어댔다. 기염을 토하던 전갈이 순식간에 검은 재가 되었다. 전갈이 스쳐간 정강이에는 그 후 몇 년간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바로 이때였다. “야! 저것 좀 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병사들이 산 밑에 있는 커다란 연못을 내려다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같이 생긴 동물이 상체를 1m 이상 물 위로 내놓고 물을 가르면서 달리고 있었다. 뱀인지, 용인지, 괴물인지 분간이 안됐다. 호수에 굵은 파랑을 일으키며 달리는 괴물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장관이었다. 무서움과 신비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씩 연못가로 내려갔다. 발길은 연못가를 향하면서도 눈은 동물이 연출해내는 장관에 고착돼 있었다. 연못가에 가서 보니 뱀의 길이는 10m, 직경은 20㎝ 이상 돼보였다. 갑자기 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자 뱀은 호수 가운데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몇 명의 병사가 발을 구르고 우-우 하고 소리를 치며 돌을 던져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몇 병사들이 물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뱀과 눈을 맞췄다. 짧은 막대기를 들고 뱀을 위협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자 뱀이 갑자기 물속으로 잠수했다. 물속 깊이 들어간 병사의 얼굴에 갑자기 공포감이 서렸다.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뱀이 물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올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막대기로 자기 무릎 앞을 좌우로 부지런히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진 병사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색이었다. 뱀은 이렇게 여러 차례 병사들을 골려주었다.
그런 게임으로는 그 괴물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야전 전화선을 길게 토막 내 커다란 올가미를 만들어 뱀을 향해 던지게 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뱀의 목이 커다란 올가미 안에 들어왔다. 올가미를 잡아채자 뱀의 목이 올가미로 조여졌다. 뱀이 육지로 나오자 속도가 빨라졌다. 막대기 길이보다 끈의 길이가 더 길어서 막대기는 뱀의 접근을 저지하지 못했다. 커다란 두 개의 둑 사이로 희뿌연 흙탕물이 흘렀다. 한 병사가 뱀을 끌고 왼쪽 둑에서 달렸으나 그는 곧 뱀의 속도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오른쪽 둑에는 다른 병사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양쪽 논둑이 갑자기 단거리 경기장이 됐다. “야, 김병장. 그 막대기 이리로 던져.” 그러나 김병장은 쥐고 있던 막대기를 던질 수 없었다. 그나마 던지면 뱀이 더 자유로워져서 그에게 달려들 것만 같아서였다. 키가 작고 똥똥한 중대장이 왕년의 기록 때문이었는지 바통을 받아 쥐고 달렸다. 그의 고개가 앞뒤로 분주하게 돌아갔지만 그는 뱀의 상대가 못 됐다.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짙은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나는 그에게 끈을 던지고 오른쪽 둑으로 건너뛰라고 소리쳤다. 막대기를 던지자 올가미가 뱀의 목에서 벗겨졌다. 뱀은 아직도 올가미에 걸린 줄 알고 폭 1.5m 정도의 수로를 가로질러 따라왔다. 병사들은 뱀이 공격하러 따라오는 줄로 알고 제각기 흩어졌다. 병사들이 흩어지자 뱀은 성황당 같이 쌓아올려진 돌무덤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꼬리부분만 남게 되자 갑자기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육중한 정글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병사에게 꼬리를 잡아당기라고 했다. “소용없습니다. 소대장님, 뱀은 절대 뒤로는 나오지 않는 답니다.” “야, 그래도 한번 당겨봐. 힘껏.” 여러 명이 달려들었다. “하나, 둘, 셋.” 힘을 순간적으로 집중했더니 뱀이 조금씩 끌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번을 하자 뱀은 허리까지 끌려 나왔다. 그런데 또 다시 큰 일이 생겼다. 뱀이 완전히 나오면 아무리 꼬리와 몸통을 잡고 있어도 상체를 움직여 단번에 물것이기 때문이었다. “야, 꼬리에서부터 굴의 입구까지 노출된 뱀의 온 몸을 빈틈없이 대들어 발로 눌러. 내가 하나 둘 셋을 하면 발을 조금 풀었다가 다시 밟아야 해. 발을 푸는 동안 당기는 사람들은 한 번에 아주 조금씩만 당겨야 해. 한꺼번에 많이 당기면 뱀에게 물려” 드디어 목 부분이 보였다. 힘이 센 병사가 정글 장갑을 끼고 목의 잘록한 부분을 힘껏 조였다. 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평소에 색시 같던 의무병이 핀셋을 가져다 이빨을 모두 뺐다. 병사들은 안심하고 뱀을 나란히 팔에 걸치고 사진들을 찍었다. 뱀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15명의 병사가 나란히 서서 들어 올렸다. 연대에서 헬리콥터가 날아와 그 뱀을 가져갔다. 어린 마음에 모두는 그 뱀이 창경원에 갈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연대장님 등 어른들이 보신용으로 삶아 드셨다고 했다. 이빨이 없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후회를 했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하나의 생명을 절단 냈기 때문이었다. 베트콩의 목숨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소위 때, 베트콩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수색 작전을 나갔다. 불과 200m 거리에 있는 나무숲에서 검은 옷을 입은 베트콩(?)들이 날아다니듯 이리저리 뛰어 도망을 쳤다. 이를 지켜본 한국군은 모두 그들을 베트콩으로 단정했다. 산 속에 검은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양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105밀리 야포를 퍼붓도록 유도했다. 내가 유도한 포탄이지만 그 위력은 참으로 무서웠다. 나에게까지 파편이 날아올 정도로 무자비하게 때렸다. 이를 지켜보는 보병들은 입을 벌린 채 나뭇가지들이 잘려지고 쪼개져 내리는 장관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쏠 만큼 충분히 쏘았다. 사격이 멈춰지자 병사들은 독 안에 든 쥐를 잡는다는 부푼 꿈을 가지고 포탄 세례를 받은 정글을 수색했다. 그런데 그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숲 속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핏방울 하나, 하다못해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 옷자락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거기엔 지하 아지트가 건설돼 있는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리 저리 뛰어다니던 여러 명의 검은 옷들이 갑자기 사라질 방법이 없었다. 핏방울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당시의 허망했던 사실, 그 당시에는 너무나 서운했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살았어야 했다. 38년 전의 진실은 지금의 진실이 아니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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