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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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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23 조회11,8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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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반죽을 두 손으로 늘려놓은 것 같이 기다랗게 늘어진 베트남 국토, 동해안을 따라 1번 도로가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 도로를 따라 광활한 농토가 전개되어 있었고, 미군이 설치한 송유관도 끝 간 데 없이 이어져 나갔다. 한국군은 바로 이 1번 도로 주변에서 월남 주민과 친구가 되기 위한 선무작전을 펴면서 베트콩 지배지역을 하나씩 평정해 나갔고, 미군은 국경지대에서 월맹 정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맹호사단은 퀴논시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을, 백마부대는 나트랑과 뚜이호아시를 잇는 남부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백마사단 중에서 제28연대는 북쪽 뚜이호아 지역에, 제29연대는 사단사령부와 함께 닌호아라는 중간 지역에, 그리고 제30연대는 맨 남쪽인 나트랑 지역을 맡고 있었다. 제28연대 지역은 베트공과 월맹군의 소굴로 육군소위가 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이 된다고 전해지는 지역인 반면 남쪽 제30연대 지역은 소위가 가도 1년 내내 베트콩 구경 한번 못하는 그야말로 안전지대였다. 파월 새내기들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야 사단사령부 보충대에 도착했다. 숙소로 지정된 우중충한 군용 텐트가, 대낮에 받은 고열과 특유의 천막 냄새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모기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월남 모기! 어찌나 극성맞던지 촘촘히 짜인 작업복까지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월남의 밤은 모기약 없이는 견디지 못했다. 보충대 중대장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 흔해 빠진 모기약 하나 지급하지 않아 월남에서 보내는 첫날밤을 모기에게 뜯기며 지새우게 하는 악몽의 밤이 되게 했다.

  

군함에서는 멀미를 핑계로 청소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 친구들이 보충대에 오면서부터는 갑자기 초롱초롱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하는 데에는 꾀를 부리던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에는 재주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싶었다. 이튿날이었다. 맹활약(?)을 벌이던 친구들은 사령부에 남게 됐다며 즐거워했고, 나 같이 배경 없는 30여 명의 장교들은 시누크(CH-47)라는 육중한 헬리콥터를 탔다. ‘따따따……’, 시누크 지붕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프로펠러가 내는 굉음이었다. 밖은 볼 수 없고, 소리만 요란하게 고막을 울렸다. 어두컴컴한 기체 내에 갇혀버린 새내기들의 입은 40분 동안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조용한 눈망울들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해 보였다.


나는 제28연대의 파트너인 제30포병대대에 배치됐다. 보병연대 본부와 포병대대 본부는 해안가 넓은 백사장을 낀 광활한 대지에 함께 위치해 있었다. 군수부대, 병원, 간호장교 숙소, 보병 제1대대 본부, 한국군 PX, 헌병대, 보안대도 같이 있었다. 기지 주변에는 윤형 철조망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기지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었다. 위치가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기 때문에 1년에 몇 차례씩은 베트콩으로부터 심한 박격포 사격을 받았다. 한때는 십여 명의 특공조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다 우리 초병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사살된 적도 있었다. 언제나 적에게 노출돼 있는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격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때로는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큰 작전이 없는 날에는 매일같이 베트콩이 다니는 길목에 나가서 매복을 했다. 베트콩은 야간에 활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닐 만한 길목을 소대 단위로 매복해 있다가 그 길을 따라 오가는 베트콩을 잡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늘 공격작전을 하는 이유는 마을을 베트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베트콩을 늘 공격하지 않으면 반대로 한국군이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연대기지로부터 3㎞ 떨어진 서남쪽 지역에는 삼각산보다 더 우람한 바위산이 우뚝 서서 한국군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들, 더러는 25층 아파트보다 더 큰 바위들로 엉켜져 이루어진 산이었다. 정상에는 높이 150m나 되는 깎아 세운 듯한 쌍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밑에는 천길만길 시커먼 바닷물이 호수 물처럼 잔잔하게 고여 있었다. 월남에서도 유명한 봉로만이었다. 동그란 봉로만의 저편에는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백사장이 둥근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 띠에 갇혀 있는 깊은 물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연출해 냈다. 때로는 검푸른 색, 때로는 에메랄드 색, 때로는 투명한 가을 하늘색들이었다. 아침으로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바라볼 때마다 색깔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평화 시라면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라면 나는 도착하자마자 포병대대 본부로 가서 대대장과 포대장에게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도착한 날은 그 유명한 한 달간의 ‘홍길동 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대장과 포대장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곧바로 보병 3중대로 직송됐다. 보병 제3중대는 기동타격중대였다. 급한 상황이 전개되거나 다른 부대에 작전 지원을 나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5분 대기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제3중대는, 연대가 가지고 있는 14개 중대 중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기록했다. 백마사단 전과의 90%는 제28연대가, 연대 전과의 50%는 제3중대가 올렸다. 보병 제1대대는 연대기지 내에 위치해 있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각기 북쪽과 서쪽으로 30∼40분간의 차량거리에 뚝뚝 떨어져 있었다.


모든 보병부대들은 베트콩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수많은 거점을 선정해서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벙커진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를 홈베이스라고 불렀다. 마치 옛날 일본의 성처럼 중요한 거점 지역에 성을 구축함으로써 거점과 거점 사이에 산재해 있는 민간 마을들에 베트콩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개념이었다. 나는 바로 이런 통제형 거점 방어 개념이 우리 한국 방어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복잡한 이야기이니까 여기에서는 소개를 생략한다. 월남전은 게릴라전이었다. 게릴라는 민간 복장을 하고 다녔다. 마을에서 만나는 민간인이 양민인지 베트콩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게릴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산은  주민이다. 주민의 도움 없이는 작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게릴라 전술의 핵심이기 때문에 모택동은 “게릴라는 고기요, 주민은 물”이라 가르쳤던 것이다. 간첩을 신고하는 사람도 주민이고, 적군의 움직임 등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람들도 주민이고, 배고픈 군인에게 밥을 지어주는 사람들도 주민이다. 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작전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게릴라전의 전문가인 채명신 장군을 초대 주월군 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주민과 게릴라를 분리시키기 위해 대민활동을 강조했다.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하라”,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외교관이다”, “예의를 가지고 주민을 대하라.” 이러한 명령적 구호에 따라 한국군은 마을 주민에게 쌀을 주고, 교량과 건물을 지어주고,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잔치를 열어주고, 치료를 해주었다. 월남에서 ‘따이한’ 하면 친절의 대명사였다. 같은 물자라도 미군이 주면 거부하지만 한국군이 주면 고마워했다. 낮에는 민간 마을에 따이한의 이미지를 심어 주민의 마음을 한국군 편으로 만들고, 밤에는 이러한 민간인들이 베트콩으로부터 보복을 받지 않도록 마을을 지켜 주었다.


이 지역에는 ‘피의 계곡’이라 불리는 베트콩 요새가 있었다. 집채만 한 크기의 바위들로 구성된 계곡이라 항공기들이 아무리 많은 폭탄을 퍼부어도 끄떡없었다. 지하 2층, 3층 심지어는 5층까지 동굴이 형성돼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용감한 청룡부대가 이 기지를 공격하다가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피의계곡’이었다. ‘앞으로 전진’하는 식으로 공격하다가 숨어서 쏘는 베트공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제3중대 중대장은 육사 16기생으로 깡마르고 작은 키를 가졌지만 생도 때에는 럭비선수였다 한다. 그는 많은 훈장을 탔지만 훗날 2성 장군으로 군을 마감했다.  관측장교인 나는 언제나 중대장과 한 팀으로 행군하면서 중대에 포병화력을 지원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나에게 자리를 물려준 장교는 육사 1년 선배였다. 전에는 별로 친해 본 적이 없던 선배였지만 나를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야, 육사 선배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로구나!’ 작전 전날, 그는 하루 종일 싱글벙글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도착이 하루라도 늦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근심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그는 한 달간의 험한 작전에 투입될 뻔했다는 것이다. 많은 장병들이 귀국을 불과 며칠 앞두고 전사했다. 이는 모든 장병에게 징크스로 작용했다. 이러했기에 귀국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나를 보자마자 그토록 기뻐했다는 건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것도 전장심리의 하나일 것이다. 새 주인을 만난 나의 당번병과 무전병이 와서 첫인사를 하고는 내가 짊어지고 나갈 군장을 꾸려 왔다. 4개의 수통에 물을 담아왔다. “소대장님, 물을 아껴 드십시오. 물만큼은 남에게 주지도 말고 달라고 해도 안 됩니다. 산 속에 있는 물에는 베트콩이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파는 수박에도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반드시 수통 물만 드셔야 합니다.”


이튿날 검은 새벽, 각자는 무거운 얼굴들에 완전군장을 메고 헬리콥터 장으로 행군했다. 마치 밤 도깨비 행렬처럼 보였다. 승객정원 5명, 헬리콥터가 땅에 닿는 둥 마는 둥 기우뚱거리며 병사들을 태웠다. 헬기가 날아가는 동안 모두가 말이 없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헬리콥터! 옆문을 닫지 않은 상태에서 옆으로 누워서 날아갔다. 안전벨트를 맸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있는 힘을 다해 앞 의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움켜쥘 필요가 없었다. 낮게 떠가는 헬기를 향해 정글 속에서 총이라도 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다. 밑에는 뽀송뽀송하게 보이는 푸른 벼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 사이로 간간이 나타나는 개울들에서는 희뿌연 흙탕물이 희미한 여명을 받아 반짝 반짝 빛을 냈다. 정글로 뒤덮인 산이 끝도 없이 전개됐다. 검푸른 솜을 뭉글뭉글 깔아놓은 것처럼 보드랍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내 넓고 평평한 고산지대가 펼쳐졌다. 산정은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라 넓게 전개된 또 다른 평야였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갈대밭이 전개됐다. 하지만 위에서 보기엔 아름다운 잔디밭이었다. 처음 보는 이국의 경치, 신기하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사람 키를 넘는 갈대밭 위에 헬기가 공중 부양된 상태에서 정지했다. 뒤뚱거리는 동안 병사들이 2m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사방으로 튀어나가 엎드렸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중대마다 내리는 곳이 달랐다. 광활한 정글 산에 2개 사단 병력이 이런 식으로 바둑판처럼 깔렸다. 가장 길었다는 홍길동 작전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정글 속에서의 행군은 언제나 일렬종대였다. 1996년 9월18일, 강릉 해안에 북한 잠수함이 자살골로 좌초했다. 잠수함에는  승무원을 포함해 26명의 무장간첩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좌초를 당하자마자 산으로 달아나, 11명은 산속에서 스스로 자살을 했고, 13명은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되고 1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까지 군은 96년 9월18일부터 11월7일까지 51일 동안 매일 평균 7만 명의 병력을 산에 깔았다. 당시 합참의장은 병사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산을 샅샅이 뒤질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산 속에서의 행군은 절대로 횡대일 수 없다. 길을 따라 일렬종대로 행군하기에도 벅찬 것이 산악작전이다. 그래서 길목을 잡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휘관의 전략적 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베트콩은 이렇게 행군하는 한국군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켰다.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기도 했고, 웅덩이를 파서 독침을 꽂아놓은 후 위장을 해놓기도 했고, 매복을 하기도 했다. 강릉작전을 지휘한 그 4성 장군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이 태백산 일대에 병사를 저인망식으로 깔아 포위망을 좁혀감으로써 불필요한 피해를 야기했다. 대령 1명, 대위 2명. 하사관 1명, 사병 4명이 사망했고, 17명이 부상했다. 민간인 사망자도 여러 명 있었다. 월남전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무모하고 무식한 작전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정글 속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로 뒤엉켜 있는 곳이 많다. 그런 곳들에는 베트콩이 서식하는 동굴이 마련돼 있다. 나무 밑에는 만년 열대림에서 떨어져 내린 잎들이 수백 년 지나는 동안 검은 흙으로 변해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곳들은 행군하기에 편했다. 걸을 때는 한없이 땀이 흘렀지만 몇 분만 쉬고 있으면 한기가 돌 만큼 추웠다. 그러다가도 가시나무 관목 숲이 나타나면 사정은 달랐다. 두꺼운 가죽장갑을 낀 병사가 행군대열의 맨 앞에 서서, 장수의 칼처럼 생긴 정글도를 가지고 통로를 개척해 주었다. 한 시간에 불과 몇 십 미터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햇볕은 여과 없이 내려 쬐고, 얼굴은 빨갛게 익고, 몸과 얼굴의 여기저기에는 생채기가 나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물이 동나 버렸다. 작업복이 소금가루로 하얗게 뒤덮였다. 땀이 말라 소금이 된 것이다. 입이 타들었다. 침조차 말라버렸다. 처음으로 당해보는 목마른 고통,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바로 이때, 50m 정도로 앞서 나간 선발대로부터 날카롭게 째지는 총성이 들려왔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숨들을 죽였다. 순간, 부산항에 나왔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이 순간을 다시 무를 수만 있다면! 갑자기 세상 끝 절벽에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초등하교 1학년 때의 늦가을, 추수한 논둑을 타고 국방군이 마을로 진격해 들어왔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을과 논둑이 마주보고 있었다. 외딴 이 마을에는 겨우 다섯 채의 집이 있었다. 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2명의 인민군 패잔병들이 갑자기 이웃집으로 들어가 따발총을 손에 들고 나오더니 개울을 향해  “쏘리 쏘리?” 하고 소리를 쳤다. 개울 건너 논두렁에는 국방군이 길게 늘어서서 마을 쪽을 바라봤다. “그래, 쏴라.” 서울에서 피난 나온 누나가 있었다. “누나, 저쪽에 늘어선 군인들은 누구야?” “응, 국방군이야. 이제 곧 싸울 거야.” “야, 신난다. 우리 구경하자.” “그래, 그러자”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누나가 나를 잡아챘다. “야, 총 쏘면 우린 죽어. 얼른 느네 집 방공호로 가서 숨어야 해.” 대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총소리들이 요란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조용해졌다. 나는 누나 손을 잡아끌며 구경 가자고 졸랐다. 벽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나왔다. 대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국방군 아저씨가 앞집 지붕 위로 날쌔게 올라갔다. 누나 말로는 국방군 소위라 했다. 인민군과 서부활극이 벌어진 것이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뜨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우물 위에는 동그란  노깡이 솟아 있었다. 그 노깡 벽에 몸을 숨기고 인민군이 지붕을 쳐다보려던 찰나, 지붕 위의 소위가 먼저 보고 쏘았다고 했다. 우물가에 피가 낭자했다. 이게 내 머리 속에 있는 전투의 모습이었다.


선발대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총소리가 멈추고 적막이 흘렀다. 나는 좌우 주위는 물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속을 바쁘게 살폈다. 베트콩들이 나무 위에서 총을 쏠 수도 있었으며 바위틈에서 솟아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곧 선발대로부터 무전을 통해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총소리는 검은 옷을 입은 베트콩 소년이 유발시켰다. 한 그루의 나무 뒤에서 다른 그루의 나무 뒤로 날아다니듯 잽싸게 움직이는 소년에게 가해진 사격이 그토록 요란했던 것이었다. 중대 본부가 현장으로 접근했다. 조금 전 긴박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달리 현장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검은 옷을 입은 맨발의 미동을 잡아놓고 몇 명의 병사가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이 어찌나 예쁘던지 병사들이 저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미동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발바닥은 군화 의 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는 넓게 벌어져 있었다. 얼굴은 매우 예쁘고 어려 보이지만 오랫동안 산에서 활동한 베트콩이 틀림없어 보였다. 놓아주면 한국군의 위치를 베트콩 본부에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병사가 주어들은 몇 마디의 월남어 실력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브이씨, 어 더우?” 하니까 “콩비억” 하고 고개를 저었다. ‘베트콩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서울의 소년들과 비교해보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C-레이션 깡통을 따주고 과자와 초콜릿을 주었더니 참으로 맛있게 먹었다. 장난기 있는 병사가 어쩌나 보려고 담배를 주었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담배 맛을 음미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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