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으로 떠나는 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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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25 조회12,46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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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북쪽 산골 오음리에는 파월장병들에게 월남의 기후, 지형, 작전요령에 이르기까지 기본지식을 알려주고 새로운 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훈련을 시켜주는 ‘파월장병교육대’가 설치돼 있었다. 설치 목적으로 보아서는 한없이 고마워해야 할 곳이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기억하기조차 싫을 만큼 기분 나쁜 곳이었다. 오음리로 가라는 명령지를 받아들고 춘천에서 오음리 행 버스를 탔다. 험준한 산을 여러 구비 넘었다.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릴 때마다 천야만야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 금방이라도 버스가 내려구를 것만 같았다. 두 시간 정도 마음을 졸이고 나니 드디어 항아리처럼 푹 패어진 깊은 분지가 나타났다. 완전 찜통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다 대지가 뿜어내는 열기가 콱콱, 숨을 막았다. 악질적인 기후가 월남을 쏙 빼닮았다고 했다. 이 찜통 속에서 6월 무더위를 견딘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말이 교육대이지 시간 때우기였다. 솔잎마저 축축 늘어지는 땡볕 더위에 새롭게 배우는 것은 없고, 하루 종일 철모를 쓰고 뜨거운 직사광선에 노출되어 고생만 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고마운 훈련이 아니라 일부러 주는 고통 같았다.
대위나 소령급의 피교육자들이 나서서 돈을 걷었다. 기간요원들에게 잘 봐달라는 뜻으로 전달되는 돈이었다. 약효는 곧바로 나타났다. 많은 훈련이 생략되고 축소됐다. 막상 월남에 가보니 오음리 교육대는 전혀 불필요한 곳이었다. 월남전에 필요한 지식은 월남 현지에 가서야 비로소 습득할 수 있었다. 오음리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교육관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지어낸 소설에 불과했다. 파월장병교육대는 그럴듯한 명분을 이용하여 군 간부들의 자리를 늘리기 위해 만든 부정한 곳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몇몇 장군들의 빗나간 발상으로 인해 국가예산이 낭비되고 32만5천명의 파월장병들이 불필요하게 생고생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는 마당이라 누구나 가족을 그리워했다. 살아서 돌아올지 죽어서 돌아올지 모른다며 풀들이 죽어 있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전우들의 심리적 약점을 악용하여 적은 돈이나마 착취한다는 것은 상상 밖의 야비한 행위였다. 출국하는 날 아침, 파월장병들은 춘천까지 다섯 시간에 걸쳐 뙤약볕 도보행군을 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발목이 아파 거의가 절뚝거렸다. 더위를 먹고 쓰러지는 장병도 많았다. 군대 상식대로라면 이들은 차량으로 수송됐어야 했다. 수송예산도 이미 반영됐을 것이다. 아마도 문서상에는 차량으로 수송한 것으로 꾸며 놓고 그 휘발유를 내다 팔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의 오음리에서, 나와 함께 고생을 하고 파월한 하사관들 중에서 여럿이 전사했다. 전사한 전우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그들의 주머니에서 코 묻은 돈을 받아낸 교육대 간부들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곤 한다. 갑자기 파리 떼가 생각났다. 1951년 1⋅4후퇴 때 충청도 음성으로 피난을 나갔다 돌아오니 온 마을이 불타 있었다. 구들 밑에 파묻은 쌀과 김치가 불에 그을려 매콤한 매연 맛이 깊이 배어 있었다. 물에 씻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누는 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따뜻해 보이는 묘지에서 햇볕을 쐬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데굴데굴 구르다 변을 보았다. 손가락 굵기의 회충들만 가득 나왔다. 이러한 계절에 20대 후반의 젊은 여인이 머리에 꽃을 달고 히죽히죽 웃고 다녔다. 어쩌다 제 정신이 돌면 4살 난 여아를 부둥켜안았고, 정신이 나가면 팽개쳤다. 어느 날 그 여인은 마을 밖 신작로 배수로에 하늘을 보고 잠들었다. 여아는 엄마의 젖에 입술을 대고 이따금씩 눈만 깜박였다. 파리 떼가 여아의 눈에 몰려들었다. 쫓을 힘도 없었다. 어쩌다 눈을 감았다 뜨면 조금 날아올랐다 다시 내려앉았다. 눈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습기를 빨기 위해! 우리 사회에는 위의 여자 아이의 처지로 상징될 수 있는 불쌍한 인구가 있고, 파리 떼로 상징될 수 있는 인구들이 있다. 위의 교육대 이야기는 일반사회와 비교해 보면 애교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순수해야 할 군에서 더군다나 목숨을 걸고 이역만리로 떠나가는 전우들을 상대로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액수에 관계없이 서글프고 화나는 일이었다.
춘천역이었다. 부산행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고국을 등지고 전쟁터를 향해 떠난다는 기막힌 절박감보다는 우선 지긋지긋한 악마의 소굴을 빠져 나왔다는 안도감이 앞섰다. 여기저기서 콧노래가 들렸다. 웅성웅성 이야기 소리도 들렸다. 기차가 춘천역에서 점점 멀어지자 차츰 이별의 아픔과 전쟁의 공포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차는 무거운 침묵만 싣고 달렸다. 부산항, 군악대가 경쾌한 군가와 유행가를 쉴 새 없이 연주했지만 배웅 나온 가족에게나 떠나는 병사들의 무거운 마음에는 별 기별을 주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단체로 나와서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러줬지만, 장병들의 눈망울은 가족을 찾는 데만 분주했다. “사랑해”, “몸조심해”, “무사히 돌아와야 해, 꼭, 알았지?” 이리저리 가족을 찾아내서 몇 마디 나누기가 바쁘게 환송행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생전 처음 보는 2만 톤짜리 군함에 승선했다. 고층아파트 몇 개를 포개놓은 것만큼 거대했다.
투박한 뱃고동 소리가 무겁게 내려깔리면서 배는 부두로부터 한 뼘씩 멀어져 갔다. 몇몇 병사가 가지고 있던 라디오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라는 애조 띤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거대한 색소폰에서 나는 듯한 뱃고동 소리,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가 터질 듯한 이별의 아픔을 더욱 아프게 자극하면서 파월장병과 그 가족들의 가슴에 일생 내내 지워지지 않을 긴 여운을 남겨놓았다. 살아서 돌아온 용사들에게는 추억의 소리로, 전사한 용사들의 가족에게는 가슴을 저미는 진혼곡으로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 부산항 전체가 손바닥만 하게 멀어져 가더니 이내 수평선 밖으로 사라졌다. 가슴을 저미던 이별의 애절함도 서서히 몽롱한 과거 속으로 멀어져 갔다.
서서히 뱃멀미가 찾아들었다. 청소구역이 할당됐다. 함상생활이라는 또 하나의 군대생활이 강요되었다. 상냥하고 통통하게 생긴 육사 18기생 장대위가 오음리에서부터 4년 후배인 나를, 때로는 보좌관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애인이라 부르기도 하면서 친근하게 대했다. 그는 나중에 3성장군으로 예편했다. 그는 함상에서 그가 맡은 일을 모조리 나에게 맡겼다. 나는 그를 대신해서 동료들에게 청소구역을 할당하고 청소상태를 검사하고 다녔다. 원래 나는 위가 약해서 뱃멀미가 남보다 더 심했다. 나도 남들처럼 주어진 구역만 청소하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선배대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더러의 동료급 장교들은 청소를 하지 않고 꾸물대면서 임무를 부여하는 나를 향해 짜증까지 냈다. 같은 처지에 처해있으면서 누구는 넓은 공간을 헤매고 다니면서 임무를 부여하고, 감독하고, 보고하기에 바쁜 반면 누구는 나보다 훨씬 튼튼하면서도 누워서 불평이나 하고!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
3일이 지나니까 뱃멀미가 가시고 차츰 얼굴들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갑판 위로 올라와 항해를 즐겼다. 망망대해를 마치 내 몸으로 직접 가르며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쾌감을 느끼는가 하면 시커먼 바닷물을 내려다보면서 깊고 험한 물살에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르는 물고기,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에 한동안 정신을 빼앗기기도 했다. 망망대해의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길게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온 하늘의 별들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똥별이 ‘길게 늘어진 연줄’처럼 곡선을 그리며 쉴 새 없이 떨어져 먼 바다 위에 내렸다. 흰 가운을 입은 필리핀 종업원이 딸랑이 종을 흔들고 다니면서 식사시간을 알렸다. 함정의 장교식당은 넓고 깨끗했으며 피아노도 한 대 놓여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피아노에 앉아 재즈곡을 치고 나가는 미국인 종업원이 멋있어 보였다. 식탁에는 영어로 쓰인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앉은 식탁의 사람들, 나에게 메뉴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라고 해서 영문 메뉴판에 익숙한 건 아니었지만 단지 필리핀 종업원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나의 영어 실력을 신뢰했다. 내가 메뉴를 정해 종업원에게 알려주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미투’(me too, 나두요)를 반복했다. 미투 식 주문 때문에 주방에는 며칠 안 가서 닭고기와 쇠고기가 동이 났다. 반면 다소 낯선 양고기와 칠면조 고기 같은 것들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하여튼 식탁에 앉아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주문하고 서비스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인건비 때문에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머나 먼 옛날의 황금시절(good old days)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일주일 만에 나트랑이라는 유명한 항구에 도착했다. 누구도 그 항구가 무슨 항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하선하라고 해서 배에서 내렸고, 승차하라고 해서 트럭에 탔다. 트럭은 나트랑시의 후미진 골목길을 통과하여 태양열에 검게 타버린 대지 사이를 뚫으면서 달렸다. 억세게 생긴 검은색 가시나무 관목들이 도로변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다. 그 후 3년이 지나 나는 나트랑 항구를 휴양 차 들렸다. 이때 다시 본 나트랑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끝없이 길게 뻗어간 백사장을 따라 야자수가 줄을 이어 늘어섰고, 길고 긴 실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와 한가롭게 부서지고 있었다. 밤이면 또 다른 정취가 무대의 제2막을 장식했다. 낮게 드리워진 십자성, 교교히 비치는 달빛, 화려한 전등불에 비춰지는 기다란 파도가 어우러지는 앙상블이 남국의 정취를 한껏 북돋아주었고, 야자수 밑에 모여 앉은 선남선녀들은 조개구이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술잔을 기울여가며 밤 가는 줄 몰라 했다. 전쟁 속에서도 낭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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