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에 내던져진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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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29 조회12,7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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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또 다른 야전 내무반 생활이 시작됐다. 사관학교 내무반이 호텔방이라면 포병학교 내무반은 3류 여관방이라 할 수 있었다. 내무생활을 지도 감독하는 간부들은 통상 육사 선배였다. 이들은 사관학교를 18기로 졸업한 중위들로 소위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새카만 후배로만 취급했다. 소위들은 “우리를 언제까지 영내생활로 붙들어 맬 작정이냐? 우리도 어엿한 장교들인데 왜 자유를 구속하려고만 하느냐”, 선배들을 향해 항의했다. 하지만 선배들도 장군들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그래도 후배들은 그들의 요구를 반영해주지 못하는 선배들을 원망했다. 선후배간에 불신과 불화가 싹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병과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기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후방을 막론하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배들의 눈에 비친 육사 선배들은 많은 경우에 마음이 그다지 너그럽지 못하고 편협하고, 융통성도 없고, 베풀 줄도 모르는 사람들로 비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저 애는 내 후배다.” 실무부대에서도 육사생활이 연속되는 것이다. 선배는 선후배 개념만 가지고 후배들을 지휘했다. 그래서 후배들은 선배들과의 대화를 기피하면서 불신을 쌓는 경우가 허다했다. “너는 기껏해야 후배에 불과해. 네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느냐. 육사를 나오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너라고 해서 용빼는 재주가 있느냐.” 후배가 아무리 훌륭하고 능력 있어도 후배는 어디까지나 후배에 불과했다. 이는 나이가 들어도 한 결 같이 지워지지 않는 육사인들의 고질병인 것 같다. 일반 사회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후배들이 있어도 선배들은 후배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느냐는 표현들을 한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나는 선후간의 불화 내용을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방, 월남, 합참, 육군본부 등에 근무하면서 사관학교 선배들을 직속상관으로 모시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역시 국방부에서 생전 처음으로 육사출신 선배를 과장으로 모시게 됐다. 그리고 나는 10년 선배인 그 과장을 지금까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접했던 수많은 일반장교 출신들은 나를 키워주었지만 나와 부딪힌 몇몇 선배들은 나를 질투하고 시기했다. 물론 나의 접촉 범위가 좁기는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은 그야말로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내 후배야.” 아마도 이것이 육사인들의 단결을 해치는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 싶다.
1980년대의 8년간 나는 국방연구원에서 매우 활발하게 군의 문제점을 파헤쳤다. 정호근 대장, 신치구 차관을 비롯한 비육사 장군들은 나를 국보라고 칭찬해 주었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결과를 채택하여 5년간 예산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전체 참모회의에서 공언했다. “지박사가 장관을 보고자 할 때에는 3일 이내에 만나게 하라. 하루에 8시간을 계획해도 좋다.” 나는 육․해․공군 전군을 순회하며 내가 제안했던 예산개혁의 내용을 강연했다. 하지만 당시 많은 육사 선배 장군들은 나를 질시했다. 11기 이기백 장관, 12기 황인수 차관, 12기 황관영 기획관리실장은 나를 트러블메이커라고 불렀다. 결국 그 세 사람의 압력에 의해 나는 1987년 2월 28일 대령으로 옷을 벗고 연구소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물론 이는 엄청난 전화위복이었다. 나는 즉시 미국으로 건너가 연봉 53,000달러를 받으면서 3년간 미 국방성에 근무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부의 정책 성향과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선배가 다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불유쾌한 경험을 가진 육사인들은 나 말고도 꽤 많을 것이다. 육사인들은 그야말로 군의 대들보 역할을 하라고 비싸게 키워지는 엘리트 자원들이다. 그래서 육사인들 상호간의 불신현상은 국가안보는 물론 육사인들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는 육사인들이 교정해 나가야 할 큰 과제라고 본다.
지겹던 포병학교 기초전술 과정도 8월 말에 드디어 끝이 났다. 소위들은 4년 반이라는 단체생활을 청산하고 제각기 전방부대로 흩어졌다. 마치 어미 품을 떠난 병아리들이 흩어지듯이! 매일같이 얼굴을 볼 수 있는 동기생은 이제 더 이상 없게 됐다. 1966년, 양평에 있던 백마부대가 맹호부대의 뒤를 이어 월남으로 달려갔다. ‘달려라 백마’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인기 군가가 방방곡곡을 울렸다. 백마사단이 남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치원에 있던 제32향토사단이 정규사단으로 증편되면서 양평으로 이동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이 부대 저 부대에서 공출돼 왔다. 각 부대에서는 예쁜 녀석들은 남기고 덜 예쁜 병사들만 보냈을 것이다. 나는 제32사단 제298포병대대의 작전과 보좌관으로 보직됐다. 지역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었다. 황야에 내버려진 외로운 송아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안하고 허전했다. 이제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졌지만 이때부터는 혼자서 선택하고 혼자서 책임을 져야 했다.
직속상관인 작전과장은 고참 대위로 대대장과 부대대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체구, 성질이 급하고 변덕이 많아 동작이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한 사람이었다. 작전과에는 ROTC 소위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 소위는 작전과장의 성질을 잘 맞추면서 작전과장이 기르는 토끼, 닭, 강아지 같은 가축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고 새 가축을 사다가 재산(?)을 늘려주기도 했다. 일반대학을 다닌 젊은이와 딱딱한 육사를 나온 나와의 차이였다. 포병대대에서 작전과장의 위치와 역할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작전과장이 행패를 부렸다. 원성과 불만이 높았지만 마음씨 좋은 대대장은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행패는 날로 심했다. 밤이 되면 야외훈련으로 고생하는 포대들을 찾아다니면서 하사관들로부터 술대접을 받기도 했고,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하사관에게 트집을 잡아 조인트를 까고 뺨을 때리고도 했다. 선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다.
어느 날 나는 책상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전과장이 들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묻는 말에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 웬일인가? 그가 갑자기 뛰어오더니 다짜고짜 나의 뺨을 후려치지 않는가. “이 개새끼, 네가 임마 그렇게 거만하냐? 야, 임마, 과장이 물으면 벌떡 일어서서 대답을 해야지, 그래 임마 뻣뻣하게 앉아서 대답을 해. 이 개새끼 같으니.”
맞는 순간에는 온통 사병들의 얼굴만 떠올랐다. 부하들 앞에서 따귀를 맞다니! 쥐 굴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그 길로 자취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대대장님이 내 숙소에까지 찾아와 나를 달랬다. “지소위, 내가 작전과장을 혼내 주었으니 내일부터 출근하게. 우선 포대장 자리가 비어 있는 B포대로 내려가서 포대장 대리 직무를 수행하게, 대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소위가 지휘하는 것은 바로 지소위가 대위로 진급한 것이나 같은 것 아닌가?” 제2포대 즉 B포대에 가서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포대장 대리로 재미있게 근무했다. 포대에는 ROTC 출신 소위가 두 사람 있었다. 나와 같은 연도에 임관한 ROTC 4기였다. 백소위는 토요일에 외박을 나가면 수요일에야 돌아왔다. 주의를 주면 알았다고 해놓고는 또 그랬다. 그래서 장교들은 그를 함흥차사로 불렀다. 전주 출신 유소위는 툭하면 병사들에게 욕을 하고 난롯가에 있는 장작을 무자비하게 집어던졌다. 그의 잔인성은 순전히 습관이었다. 병사들은 그런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쌓고 있었다. 한번은 덩치 큰 하사가 술을 먹고 내무반에서 그를 향해 총기를 난사하기도 했다.
퇴근시간만 되면 예외 없이 대대장이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불렀다. 지시사항들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장교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퇴근이 늦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처럼 대대장 앞에서 상을 찡그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구태여 대대장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회의에서 늘 밝은 표정으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난감했다. 하지만 포대에 내려와 분대장 이상의 간부들과 의논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해도 쉽게 풀렸다.
그때만 해도 미8군의 지휘검열이 있다 하면 지휘관들이 아주 긴장을 했다. 추운 겨울 날 저녁, 대대장으로부터 숨 가쁜 지시가 떨어졌다. "내일 새벽 6시에 8군 출동태세 점검이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공포감마저 들었다. 경험이 많은 고참 대위들은 포대로 돌아가 간부들에게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새벽 미8군 출동태세 지휘검열이 있을 예정이다. 각자는 적재카드를 찾아놓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잘못하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이렇게 하고 이내 퇴근들을 했다.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그렇게만 하면 잘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동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차 모르는 풋내기 소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명령의 취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하사관들은 "소대장님, 이런 일, 한두 번 해봅니까? 걱정 마시고 퇴근하십시오" 이렇게 건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1개 분대에 대해서 만이라도 간단히 예행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나이 든 하사관들이 반갑지 않은 눈치를 보였다. 얼큰한 돼지 찌개와 소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무반 마루에 분필로 트럭적재함 크기의 네모를 그리게 했다. "지금 비상이 걸렸다고 가정하고 이 박스 안에 전투장비를 실어보십시다." 포병에는 장비와 물자가 많다. 출동하려면 차량마다 많은 것들을 실어야 한다. 빠짐없이 싣고, 찾고 싶은 것을 쉽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물자가 어느 차량 어느 위치에 실려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손바닥 크기의 "적재카드"였다. 어떤 주부는 냉장고의 각 위치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지를 그림으로 그려 냉장고 문에 부착한다고 한다. 적재카드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적재카드 하나를 꺼내보라고 했다. 그 카드에 따라 장비를 하나하나 실어보았다. 문제없다던 적재카드에 문제가 많았다. 적재 위치와 적재 순서가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실어야 할 장비가 어느 창고에 보관돼 있는지도 몰랐다. 찾는 장비가 무거운 물건들 속에 감춰져 있어 꺼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자주 꺼내야 하는 물자가 맨 밑에 실리도록 작성돼 있었다. 이동 중에 물자들이 이리 저리 요동을 치도록 작성돼 있었다. 내가 문제들을 지적하자 모두들 동감을 했는지 간부들과 병사들이 시키지도 않는 토의를 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스스로 풀기 시작했다. 문제를 발굴해내는 데에도 병사가 최고였고, 대책을 내놓는 데에도 병사가 최고였다. 새벽 2시가 돼서야 모든 문제가 정리됐고 새로운 적재카드도 만들어졌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딱 부러지게 외웠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얼어붙은 새벽 6시, 서슬 퍼런 비상이 걸렸다. 내가 지휘하던 제2포대는 40분도 안돼서 질서정연하게 "출동준비완료"를 우렁차게 보고했다. 대대장님 이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대위들이 이끄는 포대들은 2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위들이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막대기를 던지고 소총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성난 장교들을 피해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뛰는 양에 비추어 성과는 저조했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직적인 사고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판 없이 쌓아온 경험은 두뇌만 퇴화시켰다. "엄명"은 부질없는 존재였다. 나는 군대생활 정체를 통해 엄명을 내린 적이 없다. 협박을 한 적은 더더욱 없다. "자네들만 믿네, 잘 들 해주게. 잘 끝내고 우리 회식 한번 하지." 이렇게 한 적도 없다. 간부들과 토의를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굳어지게 된 것이다. 나를 예쁘게 여긴 대대장님은 일주일에 두 번씩 포대 앞에 1호차를 보냈다. 그럴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병사들이 내게 달려와 "소대장님, 1호차 왔습니다" 하며 매우 즐거워들 했다. 그들이 따르고 좋아하는 소위를 대대장이 끔찍하게 사랑해서 저녁먹자 데리러 오셨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대대장님은 나를 그의 집으로 태우고 가다가 가게에 들려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사서 자로 재듯이 반반씩 나누어 반주로 마시곤 했다. 이는 엄청난 영광이었다. 봉급을 몇 배로 올려준다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기쁨이 아니었다. 대대장님이 나를 귀여워해 주니까 참모들의 간섭이 없었다. 나는 자유인이 되었다. 군대를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거기에도 ‘자유공간’은 있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었다.
추운 날 저녁, 대대의 최고참 상사가 나를 PX로 초청했다. PX라고 해봐야 막걸리와 과자들을 파는 곳이었다. 흙벽돌을 올려 쌓고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얹은 오두막, 대대 내의 중사들과 상사들이 총집합해 있었다. 엉성한 나무탁자에는 막걸리에 캔 꽁치찌개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당시엔 그런 상차림에도 마음이 충분히 설렜다. 막걸리는 상급부대에서 사오다가 중간에서 약간의 개울물로 희석한 것이긴 해도 몇 사발 마시면 혀가 꼬부라질 만큼 위력이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다. 바로 그 때 하사관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가면서 충격적인 경험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상사 한 사람이 군화 끈을 풀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보였다. 온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작전과장이 사정없이 발로 찼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 뺨을 맞은 상사, 조인트를 까인 중사, 눈퉁이를 맞은 중사, 막대기로 팔꿈치를 맞아 팔을 쓰지 못하는 중사, 타격 부위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저들의 부인들은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술 마시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불끈 두 주먹이 쥐어졌다. “내가 군대를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개새끼는 죽여 버릴 겁니다. 우리 갑시다!” 혀가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졌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오솔길이 울퉁불퉁해 보였다. “예, 지소위님, 우린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모두의 눈에 초점들이 흐려져 있었다. 왁자지껄하며 좁은 숲길을 걷는 동안 모두가 비틀거렸다. 길의 여기저기가 패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 걸음걸이가 일정치 못했다. 길과 숲이 모두 뿌옇게 보였다. 저마다 굳어버린 혀로 허공을 향해 한마디씩 했다. 모두가 작전과장을 요절내자는 허풍 섞인 소리들이었다. 부대 뒷문으로부터 숲길을 따라 300m 거리에 지어진 흙담집, 창호지를 통해 하얀 불빛이 봉당에 놓인 검은 군화와 여성용 빨간 구두를 비추고 있었다. 작전과장의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애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도 들렸다.
“과장님 계십니까?” 성질 급한 작전과장이 가벼운 창살문을 성질대로 열어젖혔다. “야, 이 개새끼야, 여기가 어디라고 술 처먹고 와서 감히 행패야!” 문을 열고 나오더니 다짜고짜 나의 따귀를 갈겼다. 불이 번쩍 났다. 이내 나의 멱살을 잔득 움켜쥐었다. 합기도 유단자의 멱살을 잡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이 꺾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무릎을 꿇었다. 나의 오른쪽 무릎이 그의 얼굴을 반사적으로 타격했다. “억” 소리를 내며 경사진 언덕으로 굴러 내렸다. 굴러 내리는 그를 덮쳤다. 엎치락뒤치락 구르며 싸웠다. 10m 언덕을 다 굴러 내리자 지켜만 보던 하사관들이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손목시계도 달아나고 없었다.
이튿날 나는 부대 출근을 하지 못했다. 온 몸이 뻐근했고, 온 세상이 어두워 보였다. 하극상에 대한 처벌도 예상됐다. ‘에이 모르겠다. 제대하라면 하지 뭐.’ 컴컴한 자취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소문을 들은 부대대장 사모님이 대위 부인들을 인솔하고 찾아오셨다. 갈비찜, 두부찌개, 김치찌개, 윤기 흐르는 쌀밥 등을 잔득 싸가지고! 보나마나 부대대장 사모님이 집집에 전화를 해서 한 가지씩 만들어 오게 했을 것이다. 비상전화기란 깻망아지처럼 생긴 푸르고 투박한 쇳덩이였다. 손잡이를 맷돌자루 돌리듯 돌려 교환병에 신호를 보내면, 교환병이 상대방에게 전화선을 연결해주는 전화기였다. 손잡이를 돌릴 때 ‘딸딸’ 소리가 나서 딸딸이 전화라고도 불렸다.
“지소위!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해.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좀 참지 그랬어! 색시처럼 수줍어하고, 순해만 보이던 지소위한테 그런 불같은 구석이 다 있었네∼”, “대대에서 지소위 나쁘다는 사람은 없어, 평소에 지소위는 점수를 많이 땄고, 작전과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사람 고삐 풀린 망아지 아녜요? 대대장님도 마음씨가 너무 좋으셔서 어찌하지도 못하시고, 하긴 그 사람 혼내줄 사람 아무도 없었는데 지소위한테 잘 혼났지 뭐, 안 그래요 사모님?”, “그렇지만 술을 그렇게 마시고 상관하고 싸우면 손해 보는 쪽은 지소위라구”, “반찬들 놓고 갈 테니 많이 먹고 정신 차려 응?”
회식 때마다 가장 어린 지소위를 유난히 챙겨주시던 분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감격을 넘어 송구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들이었지만 정신없던 나에게는 마치 꿈속에 나타난 검은 환영들처럼 일정한 거리 밖을 스쳐가는 낯선 행렬 같기만 했다. 어두컴컴한 방에는 또다시 외로운 적막이 흘렀다. 대대의 모든 대위들이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떼를 지어 달려올 것만 같았다. ‘야, 이 새까만 소위 새끼가 감히 어디라고 고참 대위를 때려? 이 새끼 정신 한번 차려 봐라!’ 환청도 들렸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토끼잠이 들 때마다 여지없이 악몽이 찾아들었다. 가위에 눌려 소리도 질렀다.
오후가 되자 수송과장님이 찾아오셨다. 마음씨 좋고 시원시원한 고참 대위였다. “음, 자네 얼굴은 깨끗하구먼. 작전과장 얼굴은 아주 엉망이야. 그 사람 창피해서 출근을 못하고 있네. 이보게 지소위! 이럴 때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일세. 따지지 말고 무조건 고개를 숙이게, 작전과장에게 숙이라는 게 아니라 대위라는 계급장에게 숙이게,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쑥스럽지 않은 일일세, 잘못해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게 아닐세, 남 보기 좋게 하자는 것일세, 그렇게 하는 게 앞으로 지소위에게도 좋을 걸세. 자, 내 차를 타고 부대로 나가세”
참으로 고마웠다. 그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작전과장 집으로 갔다. 그는 차마 내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멍들고 상처 난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나의 사과에 억지로 대답했다. “괜찮아.” 다시 대대장님에게 갔더니 애써 모른 체 하셨다. 중위와 소위 그리고 하사관들은 작전과장이 얻어터진 것에 대해 고소해하는 눈치들이었다. 며칠 후, 사단 헌병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헌병대로 오라는 것이었다. 헌병대장은 육사 출신 소령이었다. 그는 나를 수사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불렀다. 나는 있었던 사실을 담담한 자세로 진술했다. “작전과장이 자네를 고발했네. 그 사람 말을 들을 때에는 지소위가 덩치도 크고 우락부락한 장교인 줄 알았더니 아주 약하고 착해 보이는구먼! 육사를 나와 이제 막 장교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런 일로 처벌을 받으면 되겠나? 사소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일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네. 앞으로는 이런 일 다시는 없도록 하게. 자네 대대장과 통화를 했네. 자네를 극진하게 생각하시더구먼. 가서 열심히 근무하게.” “네, 감사합니다.”
그는 마치 친동생이나 되는 것처럼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맙고 황송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내 작전과장은 먼 곳으로 전출해 갔다. 그가 없어지자 대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대리 포대장 노릇을 하면서도 육사를 나왔다는 것 때문에 대대 군기 장교로도 일했다. 이 부대 저 부대에서 공출돼온 병사들이라 군기가 없었다. 어른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나는 굵고 긴 서까래 하나를 구해 가지고 질질 끌고 다녔다. 폼으로 끌고 다니는 것이지 누구를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 질질 끌고 다니면 병사들이 제대로 행동했다. 그게 억울하다 싶었는지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시험하려 했다. 한꺼번에 30여 명의 병사들이 식당에서 떼를 지어 몰려나오면서 나를 힐끔힐끔 보면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뻔히 바라보면서도 경례조차 하지 않았다. 식당은 영내의 조그만 언덕을 넘어 도보로 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식사가 끝나는 대로 내무반으로 오는 병사들이라면 잘해야 3∼4명씩 무리를 지어 넘어왔어야 했다. 그런데 30명 정도가 무리를 지어 넘어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한번 떠보자는 의도였다.
나는 그들을 일렬로 세웠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두꺼운 야전잠바를 입었기 때문에 줄을 서 있는 것이 그리 고통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줄이 길게 늘어나자 뒤에 서 있는 녀석들이 시시덕거리며 장난질을 쳤다.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5열로 세웠다. 추운 겨울, 나는 느닷없이 상의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녀석들은 한편으로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옆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서까래를 높이 치켜 올려 곧 내려칠 것 같은 폼을 잡았다. 내려치면 내 앞에 서있는 병사들이 맞을 판이었다. 바로 매를 맞을 그 녀석들로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내 눈초리가 닿는 녀석마다 하나씩 둘씩 상의를 벗었다. 벗을 때까지는 호기를 부렸지만 막상 벗고 나니 추위가 살을 조이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채 5분이 안돼서 가슴이 오그라들고 턱이 떨리는 모양이다. “앞으로 30분간만 견뎌라.” 협박이었다. 눈치 빠른 녀석들이 소리를 쳤다. “잘못했습니다” “귀관들은 아까 분당 10보라는 아주 느린 속도로 걸어왔다. 각자는 지금부터 옷을 끌어안고 분당 10보의 그 느린 속도를 유지하면서 내무반으로 걸어간다. 절대로 뛰면 안 된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해산!” 처음엔 슬슬 걸어갔다. 나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하나씩 둘씩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시시덕거리더니 죽어라 하고 달렸다. 그 후부터는 부대 내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이 없었다.
나는 사단 전체의 급식감독관으로도 일했다. 사단 전체의 김장을 담그는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 양평과 용문을 흐르는 큰 냇물에 배추를 차떼기로 부어놓고, 부지런히 씻어서 김치 탱크로 이동시키는 일이었다. 그해에는 겨울이 갑자기 찾아와 하필이면 김장 날 개울물 전체가 얼었다. 물속에 있는 배추는 얼어붙고, 손발은 시리고, 통제력은 상실됐다. 장교, 하사관, 병들이 여러 부대에서 차출됐기 때문에 일을 다잡아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높은 장교들은 “작업개시”라는 명령만 내려놓고는 전권을 내게 맡긴 채, 텐트 속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막걸리를 마셨다. 하사관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텐트 속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셨다. 이런 일은 어느 한 부대에 통째로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야 통솔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새벽까지 나 혼자서 병사들을 지휘했다. 여러 부대에서 차출되어 온 병사들은 한동안 눈치를 살피면서 일하는 시늉만 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나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고참 병장들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더니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소대장님, 잠시 천막에 들어가 쉬십시오. 여기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하자포리, 그곳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당직 날이었다. 행정반 병사들은 내가 당직을 서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내 차례가 돌아오면 병사들은 반합에 쌀밥을 짓고, 꽁치 통조림으로 찌개를 만들고, 두부를 손바닥 크기로 썰어서 사이사이에 고춧가루를 넣어 끓이고, 막걸리를 받아왔다. 설렘에 들뜬 아이들처럼 싱글벙글하면서 행정반 책상 위에 상을 차리던 그 정겨운 모습은 지금도 손에 잡힐 만큼 가까이 있는 그림이요, 그리움이다. 별마저 가물가물 얼어붙은 야심한 밤, 산자락에 지어진 블로크 내무반에 피어났던 그 훈훈한 인정과 정취는 이후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되었다. 얼굴이 검고 오동통한 얼굴에 순하게 생긴 큰 눈망울을 가졌던 일등병, 키가 작고 오동통한 몸집을 가진 병장, 지금도 그 모습들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육사 졸업 후 1년간 내가 보아 온 거의 모든 것들은 권태와 회의를 느끼게 했다. 박봉, 숨 막히는 고정관념, 논리 없는 간섭, 답답한 현실, 미래에 대한 불안 이 모든 것들이 하위급 젊은이들의 숨을 콱콱 막았다.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어졌다. 우선 부대를 떠날 생각으로 공수낙하 훈련지원서와 파월지원서를 동시에 내놓고 있었다. 현실의 질곡과 어두운 미래! 장교들은 한시나마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어디에나 할 것 없이 불만과 스트레스가 분출됐다.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기세들이었다. 이런 암울한 세상에 한 줄기 구멍이 뚫렸다. 1967년 5월 어느 날 공수부대 낙하훈련 소집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나는 며칠간의 휴가를 보낸 후 다블백이라는 국방색 자루를 둘러메고 청량리 행 중앙선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 열차 내에서 우연히 부대원을 만났다. 그는 내가 파월자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인사명령이 내려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곧바로 부대로 돌아가 보라고 했다. 아, 두 가지 좋은 일이 동시에 생기다니! 물론 나는 공수훈련을 포기하고 월남 행을 결심했다.
월남에 먼저 간 동기생들의 전사 소식이 속속 날아들었다. 그래도 초급 장교들은 참전기회를 꼭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참전 기회를 갖지 못하면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들 했다. ‘맹호는 간다’, ‘달려라 백마’, 경쾌한 군가가 매일같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치고 이 군가에 눈시울을 적셔보지 않은 사람 드물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남을 도울 수 있다’, ‘우리도 민주주의 수호에 주역이 됐다.’ 그 시대에는 이런 자부심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했다. “아, 자랑스럽다, 대한의 건아!”, “국위를 선양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보무도 당당히 이국만리 전쟁터를 향해 떠나는 저 늠름하고 자랑스런 대한의 건아들을 보라!……” 방송국 아나운서들은 북받치는 감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광재 아나운서의 흥분한 음성이 청취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파월장병들이 늠름하게 벌이는 퍼레이드가 국민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할 때 온 시민들이 열광했듯이 서울시민들도 그렇게 열광했다. 가도에서, 건물 속에서, 옥상에서! 여학생, 주부, 배우들이 퍼레이드 대열로 뛰어들어 꽃다발을 걸어주었다. 모든 장병들의 목에 몇 개씩의 꽃다발이 걸렸다.
강재구 소령! 파월훈련 중 한 부하가 병사들 틈으로 잘 못 던진 수류탄으로부터 부하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몸을 던져 수류탄 폭발을 끌어안고 산화한 강재구 대위가 1계급 특진되어 영웅으로 등장했다. 이는 타락했던 전후의 귀족세력과 침체됐던 사회분위기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주월한국군의 눈부신 역할이 거의 매일같이 뉴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 극장에서는 따이한의 활약상과 용맹성이 「대한뉴스」를 장식했다. 최근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국민의 마음이 하나 되어 열광하듯이 그 때는 파월한국군 뉴스에 국민이 하나 되어 열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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