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생활과 얼차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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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41 조회11,9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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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28일, ‘짐승훈련’ 과정에서 20명이 낙오했고 180명이 육사 22기로 정식 입학했다. 사관학교는 3개의 커다란 조직으로 나눠져 있다. 생도가 기숙하는 내무생활을 관장하는 조직을 생도대라고 하고, 학과 과목을 가르치는 조직을 교수부라고 하며, 시설과 보급을 담당하는 조직을 근무부대라고 한다. 사관생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곳은 역시 내무생활을 관장하는 생도대였다. 생도대에는 8개의 내무반 건물이 있었고, 각 건물은 1중대 건물, 2중대 건물 등으로 불렸다. 각 건물에는 1⋅2⋅3⋅4학년이 골고루 혼합된 100명 정도의 생도가 생활하고 있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교수부에서 공부를 했고, 나머지 모든 시간은 내무반 생활로 채워졌다. 한 방에는 4명이 생활했다. 2개의 2층 침대가 양쪽 벽에 붙어 있고, 가운데에는 4개의 책상이 서로 마주 보도록 모아져 있었다. 2⋅3학년은 같은 학년끼리 한 방을 썼고, 1학년생들은 4학년생과 방을 함께 썼다. 1명의 4학년생이 3명의 1학년생들을 병아리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아침 6시, 기상나팔 소리가 정적을 깨면서부터 모든 방에서는 푸다닥 툭탁 소리가 요란했다. “집합…… 1분전, 집합 30초전, ……집합 5초 전!” 아침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들리는 상급생의 구령이었다. 하루에도 6회 이상, 4년 내내! 식당에 갈 때에도 집합과 인솔, 강당으로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집합과 인솔이었다. 그게 지긋지긋해서 “인솔해서 가면 천당도 싫다”는 말이 나왔다. 아침 6시에 일조점호를 취하고, 그 후 8시까지는 세수하고, 침대정리로부터 개인 소유물들을 정리정돈하고, 청소하고 식사하는 시간이었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의 2시간은 석식시간과 자유시간이고,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는 자습시간이었다.
1학년이 자유시간을 갖는다는 건 사치였다. 오후 6시부터 8시까지는 지옥이었다. 2학년들이 1학년을 괴롭힐 온갖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당했으니 너희들도 당해봐라.” 멀리서 보면 아늑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하얀 집, 그런 건물 뒤에는 눈물과 공포의 ‘ㄷ자 광장’이 있었다. ‘ㄷ’자란 건물이 ‘ㄷ’자형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이 광장에는 왕소금처럼 굵고 각이 진 모래가 깔려 있었다. 바로 여기가 1학년생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곳이다. 주동자는 정해져 있었다. 1학년에 의해 악당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2학년생들이었다. 이들은 거의 매일 식사집합 시에 1학년 앞에 나타났다. “1학년생들은 전원 6시 40분 정각에 ‘ㄷ자 광장’에 단독군장으로 집합한다. 알겠나?” 저녁 식사가 맛이 있을 리 없다.
“귀관들! 요즘 군기가 쑥- 빠졌어? 응?” 각이 진 왕모래 위에 두 주먹을 쥐고 엎드려뻗쳐를 하는 것이 기합의 시초였다. 불과 5분이면 주먹 쥔 너클파트에 각진 모래가 박혀 피가 났다. 30분이면 온 몸이 땀에 젖고, 주먹은 감각을 잃는다. 팔에 힘이 빠져 쓰러지는 생도도 있었다. 이런 녀석은 꾀를 부린다며 며칠간 개별적으로 불려 다니면서 기합을 받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내가 속해 있던 4중대에서는 2학년 전체가 참여하여 1학년을 뒷산에 몰아놓고 토끼몰이를 한 적도 있다. 나뭇가지 사이를 이리저리 뛰며 쫓기다 보니 구르기도 했고, 찔리기도 했다. 얼굴이 긁히고, 피와 땀으로 얼룩졌다. 정강이에서도 피가 흘렀다. 온몸이 불덩이였고, 숨은 하늘을 치받듯 잔뜩 차올라 있었다. 다음날 1학년 모두가 절룩거렸다. 절룩거리는 1학년에게 2학년들이 은근히 눈총을 주었다. 4학년들이 알면 혼나기 때문이었다. 선후배 사이에 친밀해질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선후배간의 인연은 기합으로 맺어진 것이며, 동기생들 간의 인연은 선착순으로 맺어졌다. 그 엄청난 기합과 신체단련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육사정신이고 전통이며, 무엇이 남보다 다른 것인지, 증명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습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무생활은 육체적 활동들로 채워졌다. 기합을 받고, 구보하고, 퍼레이드 연습을 하고,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를 위한 응원연습을 하고, 중대 대항 투구경기를 벌이는 것들이었다. 생도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됐을 뿐만 아니라 독서하고 사색하고 고독해 할 수 있는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자유시간이 많으면 나태해진다는 그릇된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마치 군인의 전부인 것처럼 신봉해 왔던 체력단련은 몇몇 생도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만큼 고문과 중노동에 해당했던 반면, 그것이 훗날 장교로서의 프라이드나 리더십을 키우는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가장 많은 기합을 받고 자란 생도, 가장 단련된 체력을 쌓았다는 생도가 훗날 훌륭한 장교로 성장했다는 증거도 없다. 체력단련도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다녔던 시절의 체력단련은 도가 지나쳤다고 본다. 그 나이에 체력단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과 영혼을 가꾸기 위한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절에 사회의 다양성으로부터 차단되고 독서와 사색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마저 가져보지 못한 채 임관한 청년 장교에게, 인생의 멋이나 낭만이 피어나기 어렵다. 우군에서의 리더십도, 적장에 대한 관용도 길러지기 어렵고 따라서 후세가 따르고 싶어 하는 영웅도 탄생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전쟁이었지만 전쟁 영웅들은 모두 미국인들이다. 맥아더 원수, 밴프리트 장군, 워커 장군 등의 동상은 있어도 한국군 장성들의 동상은 없다. 미국 장군들은 한국전에 자신도 바치고 자식도 바쳤다.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 86㎏ 나가던 체중이 2개월 만에 58㎏로 줄었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다.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 6⋅25전쟁에서 한국군 장군들 중에 자식을 바친 사람은 별로 없다.
정서가 부족한 문화권에서 오직 ‘청운의 꿈’을 실현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란 젊은 사관들은 그 후 군에 출세지상주의 문화를 창조했다. 출세, 청운의 꿈,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하다 보니 무엇이 정의로우냐보다는 무엇이 내게 이로우냐에 따라 세상을 사는 이들이 많았다. 국가보다는 사적인 출세가 더 중요했고, 리더십보다는 독선과 경쟁과 책임회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커닝을 해서도 안 되며, 훔쳐서도 안 된다는 사관생도의 명예규정을 통해 강압적으로 길러진 명예심은 졸업 후 마치 향수가 바람에 날아가듯 금방 바래 버렸다. 형식만 추구했지 내면적인 철학을 길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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