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쉬킨을 읊은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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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6:42 조회11,59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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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개 구대 중 제4구대에 속했다. 구대장 생도는 얼굴이 잘 구워진 가재처럼 붉은 색을 띤 미남이었지만 상당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제19기생으로 3성 장군까지 하다가 김영삼 대통령 때 하나회가 숙청되는 바람에 퇴역했다. 영하 20도의 밤 10시, 공기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유리조각 깨지듯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이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구, 아구, 죽겠다. 이제는 편히 자는구나!”
진탕 매를 맞은 듯, 무거운 몸을 추스르면서 서늘한 침대보 속에 집어넣고, 취침나팔 소리를 반겼다. 목가적이던 병영의 나팔 소리가 그날따라 더욱 구슬프게 가슴을 파고들어 그리움과 향수를 일깨워 냈다. 하루 종일 추위와 긴장으로 오그라졌던 근육들이 파르르 떨며 한 올, 한 올 풀려나갔다. 쉴 새 없이 쫓기던 애잔한 영혼들이 복잡했던 마음을 정리하고 몽롱한 밤 세계로 나른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벌써 코를 고는 녀석도 있었다.
이렇게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난데없이 그 돈키호테 구대장 생도가 눈을 반짝이며 나타나더니 구대원 25명을 깨워 집합시켰다. 집합복장은 팬티와 훈련화, 지참물은 수건 한 개씩이었다. 수건으로 목을 동여매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500m 쯤 되는 거리에 열병식이 거행되는 화랑연병장이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두께 20㎝ 가량의 눈이 약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영하 20도를 맴도는 밤공기는 발가벗은 상체와 하체를 도려낼 듯이 조여 왔다. 이를 상하로 딱딱거리며 달달 떠는 풋내기들을 화랑연병장 돌계단 맨 위에 세워놓고 그는 개선장군과 같은 포즈를 취하더니 푸쉬킨의 시 한 구절을 낭독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설움의 날들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이 오리니……”
그는 김일성을 쳐부수려면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풋내기들을 연병장 한 끝으로 데려가 일렬로 세웠다.
“귀관들! 저쪽 연방장 끝에는 김일성이 서있다. 들키지 않고 접근해 김일성을 잡아오라. 배를 눈 속에 파묻고, 눈은 김일성에서 떼지 말고 포복하라! 알겠나? 포복 개~시!”
왕복 400m 쯤 됐다. 배를 땅에 붙인 채 팔꿈치와 무릎으로 포복했다. 살은 금새 감각을 잃었다. 악에 받친 풋내기들은 별 소리들을 다 냈다.
“김일성 나와라.”, “김일성 죽여라.”
이튿날부터 동상환자가 속출했다. 구대장 생도가 인책되고 새로운 구대장 생도가 부임했다. 이러한 가혹행위는 비단 우리 구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다른 구대 녀석들은 두꺼운 얼음을 깨고 10분 이상 물 속에 머물다 나오기도 했다. 물속에 있는 동안에는 오히려 따뜻했는데 밖에 나온 이후의 고통이야말로 칼로 몸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매서웠다고도 한다. 어떤 선배는 이런 저런 가혹행위를 당해 인해 훗날 정충을 생산하지 못하는 불구가 됐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가해자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일본 병영의 폐습을 군의 전통인양 비판 없이 계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혹행위가 후배에게 정신력을 키워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혹행위를 주고받은 선후배들 사이에 상경하애의 정신이 형성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훗날 훌륭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사례도 없다. 가혹했던 선배치고 훗날 후배를 사랑했던 사람도 없다. 그냥 생각 없이 저지르는 것이었다. ‘무쇠는 담금질을 많이 할수록 단단해진다!’ 그럴 듯하게 포장해 말하지만 사실은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심사의 표현이었다. 상하급생 사이에 형성된 이러한 불신의 골은 졸업이후에도 계속됐다. 유사한 업적을 남겨도 그것을 남들이 남기면 칭찬해주고 감탄하는 반면 그것을 육사 후배가 남기면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것이 육사 인들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훈련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구보였다. 추위가 주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그러나 구보가 주는 고통은 체격에 따라 다르다. 20㎏ 이상이나 되는 완전군장을 등에 지고, 10㎏이 넘는 쇳덩어리 M-1소총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8㎞를 뛰는 일은 특히 나 같은 약체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대열에서 낙오하면 이완용을 대하듯 멸시들을 했다. 자존심이 강한 생도는 한계를 넘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구보하다가 사망한 생도는 꽤 여럿이었다. 특히 일요일 외출로부터 돌아오면 예외 없이 가혹한 구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일요일 밤은 공포의 밤이었다. 사회에서 묻어온 썩은 정신을 땀으로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구보에 대한 공포증은 참으로 참기 어려웠다. 비록 한 번도 낙오한 적은 없지만 나의 고통은 사선을 넘나들 만큼 가혹했다. 구보 노이로제에 걸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구대장 생도는 구보 중에 자주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곤 했다.
훗날 그 선배는 내가 요주의 대상이었다고 회상해 줬다.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퇴교할 것으로 예측했다는 것이다. 중간에서 육사를 퇴교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구보 공포증 때문이었다. 훗날 4학년 때, 나는 1⋅2학년 생도들에 대한 하기군사훈련을 관장하는 대대장 생도가 됐다. 키가 작은 생도로 최고지휘관 생도가 되기는 내가 처음이었다 한다. 지휘관인 내가 작으니까 참모들도 키 작은 생도들로 구성됐다. 당시 정래혁 교장님은 키 작은 지휘부를 ‘나폴레옹 클래스’라고 불러주셨다. 나는 내 휘하에 있는 중대장, 구대장 생도들에게 구보에 대한 지침부터 하달했다. 모두가 다 동기생들이었다. “구보의 목적은 체력단련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선배들로부터 강요받아온 구보는 체력단련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중노동이자 고문이었습니다. 1⋅2학년 구보는 반드시 추리닝 복장으로만 허용합니다. 1회에 1시간 이상 초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타성에 젖어온 몇몇 4학년 동기생들은 나 몰래 가혹한 구보를 시켰다.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하급생들 정신이 쑥 빠졌기 때문에 그래야만 기강이 선다는 것이다. 참으로 못 말리는 고정관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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