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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1-02-14 23:32 조회10,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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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

열정적인 국가관, 연구에 대한 욕심, 더 배우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마흔 둘, 국방분야의 선진관리 실태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국방성 여러 기관은 물론 월터리드 병원을 방문하여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가슴 뿌듯하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필자를 만난 미국인들은 필자의 호기심 가는 물음들에 참으로 열성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모두가 형님들 같고, 누님들 같았다. 워싱턴디씨에서 LA로 와 랜드 연구소와 몬터레이에 있는 무기체계 실험장에 가서 또 많은 것을 배웠다.

LA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복도의 좌측으로 좌석이 세 개 있었고, 공교롭게도 내 양쪽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창가에는 나보다 한-두 살 아래로 보이는 교포 여인이 앉았고, 복도 쪽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발랄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20대의 발랄한 여인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저씨는 무어 하시는 분이라예”

“저요? 그냥 오파상 해요”

“오파상이락카면 장삿꾼 아님니껴? 아저씨는 장사하는 사람 같지 않은 데예”

“그럼 무어 하는 사람 같이 보입니까?”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 한국에서 부모-일가들이 사는 이야기 등 등, 셋은 한 동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두 여인 모두 생각이 리버럴하고 매친 데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가면서 . . .창가에 앉은 내 또래의 여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에어컨 때문인지 한없이 코를 풀며 추워해했다. 코가 주체할 수 없이 나오자 민망해했다. 식사 때 확보해 둔 두꺼운 내프킨을 보급해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스튜어데스를 불러 사정을 설명하고 내프킨을 아주 많이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한기가 돈다며 몸을 떨었다. 스튜어데스를 다시 불러 담요를 여러 장 더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재미있던 대화는 끊기고 괴로워해 하는 환자에 신경들을 썼다. 더 이상 앉아 있는 것이 너무 괴로운 모양이었다.

“누우세요. 우리 무릎 위로 다리를 올리세요”

발랄한 여성이 이렇게 제안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그래야겠어요. 용서하세요”

나는 담요 몇 장을 내 무릎 위에 깔았다. 그리고 그 위로 그녀의 다리를 얹고 편안히 잠을 자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담요를 합쳐 두껍게 덮어 주었다. 담요가 미끄러우니까 그녀의 다리가 자꾸만 밑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밑에 깔린 담요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그녀의 다리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해 주었다.

너무나 아픈 그녀는 편안해하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 .

어느 덧 비행기는 동경에 도착했다. 그녀가 황급히 일어나 가방을 챙기더니, 출구를 향해 뛰듯이 달려 나갔다. 정신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민망해서였는지, ‘고맙다. 잘 가라’ 그런 인사도 없었다.

트랩을 내려가려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서 오더니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잡아채듯이 가지고 나갔다.

“고마웠어요. 잘 가세요”

서울에 오자마자 나는 설악산에서 열리는 경영학회 세미나에 며칠간 갔다. 비행기에서의 일은 까맣게 없었다.  그 사이에 사무실로 전화가 몇 번 온 모양이었다. 설악산에서 돌아와 사무실에 출근은 했지만 전방과 국방부 등에 부지런히 국방경영에 관한 현실을 파악하러 이리 저리 뛰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동안 어느 여성분으로부터 전화가 여러 번 왔었는데 오늘도 왔었습니다”

“그래? 내가 피하는 줄로 오해할지모르니, 다음에 전화 오면 내가 전화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남겨놓으라고 해”

어느 날 전방에서 돌아와 보니 전화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장사 좀 하느라 좀 여러 군데 다녔습니다.”

“여기 언니네 집이예요. 저도 오랜만에 서울에 와 보니 스케쥴이 매우 바빠요. 오늘 저녁 식사 할 시간 있으세요?”

8군 영내 장교클럽, 필자는 8군 영내를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다. 필자가 그녀를 초대한 것이다. 희미한 불빛에 마주앉아 와인을 곁드려 식사를 했다. 처음 갖는 식사기회였지만 두 사람은 금방 친숙해져 있었다.

“이게 오파상 명함이예요?”

기내에서 받았던 명함을 테이블에 던지며 그녀는 눈을 하얗게 흘겼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한국 언론사의 중견 간부였다. 한동안 그녀는 그가 얼마나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자기가 얼마나 노래를 잘 해서 노래모임이 있을 때마다 1등 상을 탔는지 등등 온갖 모션을 구사하면서 자랑을 했고, 간간이 귀에 대고 노래를 들려주었다.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내 귀에만 들려주는 노래들은 과연 일품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모신다는 정황들을 쉴 새 없이 조잘댔다. 그녀의 자랑을 들으면 그녀가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여인이었다.

“우리 나갈래요?”

“나가서 뭐하게요”

“산보하게요”

“그래요”

통성명을 하고나니 두 살 차이였다.

장교클럽 마당 코너에는 고목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8군 영내에는 조명등이 땅에 심어져 있었다. 밑에서 올려 비친 불빛에 나뭇잎들은 발광체가 되었다. 빛을 받는 물체가 아니라 금빛 빛을 발하는 발광체였던 것이다. 가을의 은행나무 단풍이 발하는 금빛의 불빛도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얼굴도 참 아름다웠다. 비행기 내에서 아파하던 모습이 아니라 힘이 넘치는 발랄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이도 무척 어려 보였다. 깡충 깡충 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해방된 여인이었다.

그리고 며칠 . . .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 바빠 시간을 더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곧 공항으로 나가는 길이라 했다.

“나~ 공항에 나갈까?”

“아냐, 공항에 아는 사람들 많이 나와. 너무 아쉬워. 미국에 오면 꼬옥 연락해~”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오후3시. .

나는 연구소 창가에 섰다.

샛노란 낙엽들이 가을바람에 파들 파들 떨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갑자기 허공에 떠 있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모두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가 이륙한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가슴이 비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웠다. 8군 장교클럽에서 그리고 한적한 8군 영내의 나무 밑에서 그리고 길가에서 그녀가 나지막하게 절제하면서 그리고 까부는 모션과 함께 나지막하게 불러주던 노래가 환청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간간히 내 뺨에 살포시 그리고 절제된 매너로 대주던 그녀의 뺨에서 느껴졌던 서늘함이 가슴 속을 더욱 크게 후벼내고 있었다. 창 밖에 매달린 노란 단풍잎들이 파르르 떨었다. 여전에는 아름다웠던 단풍잎들, 시를 자아냈던 그 아름답던 단풍 잎들이 이 순간만은 참으로 무능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바삐 돌아가는 연구생활, 기득권 세력과의 피나는 싸움한 도전과 다툼, 필자의 영혼은 로맨스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날의 낙엽이 지고, 그리고 한 해가 지난 어느 날 나는 또 그 연구소 창가에 섰다.

나무 가지에 앉아있던 흰 눈 가래가 하나씩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미국에서 온 크리스마스카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반가워야 할 그 크리스마스카드가 쓸쓸해 보였다.

가을이 되면 찾아드는 마음의 병, 우수(melancholy)!

열아홉, 스무 살 때에는 스치는 바람결이 우수를 실어 왔고, 흔들리는 풀잎이 우수를 전해왔다.

그리고 그 우수는. . .마흔 두 번째 가을에 한 번 더 찾아 왔었다. 아주 잠시!

그리고 30년, 나는 나이 70에 퇴근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2병을 사들고 집에 전화를 한다. 치킨 사 갈까?



2011.2.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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