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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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5:45 조회13,2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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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사 때, 경영학을 공부했다. 특히 재무관리, 회계, 기업감사, 경제에 치중해 공부했다. 미국에서의 경영학 과정은 인문계 과정이지만 최소한의 미․적분과 확률 및 통계를 가르쳤다.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책을 놓은 지 9년이 지났지만 미․적분학은 아주 쉬웠다. 확률과 통계는 난생 처음 배우는 것이었지만 그것도 쉬웠다. 한 클래스에 있는 미군 장교들은 도서관에 토의 실을 마련해 가지고 자기들끼리 지혜를 짜내가면서 문제들을 풀었다. 그러다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넓은 도서관에서 나를 찾아다녔다.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생소한 문제였지만 나는 막힘없이 풀어 보였다. 지켜 서서 내가 푸는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돌아가곤 했다. 그들은 나를 수학의 천재라고 불렀다. 확률을 처음으로 가르친 교수는 Richards라는 성을 가진 키가 2m나 되는 미남 교수였다. 군말이라고는 단 한마디도 섞지 않고 기계처럼 딱딱 끊어서 책 읽듯이 진행하는 그의 강의가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첫 확률 시험에서 클래스 평균이 20점이었지만 나는 혼자서 50점 만점을 받았다. 반의 성적이 너무 나빠서 나만 빼고 모두가 재시험을 치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4년 후, 박사과정에서 그는 내 논문 지도교수가 됐고 이어서 일생의 친구가 됐다.
기업감사 과목을 가르치던 Burns 교수는 감사를 수리공학적으로 접근하는 파이어니어로 미국학계에서 알려진 분이었다. 그 교수는 그가 박사논문 때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해 풀었던 문제를 내게 내밀며 그것을 수학적으로 풀어보라 했다. 나는 경영학과에 속해 있었지만 응용수학과에서 제공하는 과목 2개를 선택하여 그 문제를 풀기 위한 기초를 쌓았다. 확률 모델링(stochastic modeling)과 LP이론이었다. 푸는 절차를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이론을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운 것들을 응용하여 수학공식을 만들어가지고 문제를 풀었다. 기업을 3개월만 관찰하고도 1년 치에 해당하는 재무제표의 건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과학기법이었다. 내가 Burns 교수의 문제를 수학으로 풀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내가 LP이론을 공부하고 싶었을 때 그 학기에는 그걸 제공하는 과정이 없었다. 나는 친한 교수에게 찾아가 이번 학기에 LP의 원론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학교는 내게 Howard라는 학교 최고급의 교수를 전용으로 배당해 줬다. 일반 대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배려였다. 교수와 학생이 1:1로 공부한다는 것은 정말 귀족학교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교수가 노트에 속도 있게 쭉쭉 써 내려갈 때에 맥을 끊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머리가 둔하다는 평을 들으면 이미지가 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습을 참으로 많이 해 갔다.
기업감사를 가르치는 Burns 교수는 나에게 시스템공학 박사과정을 택하라며 로비전을 폈다. 하지만 1907년 그 학교 창설 이래 문과계통의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이 곧바로 이과계통의 박사과정으로 연결된 기록은 없었다. Burns 교수는 내 편을 들어줄 교수들을 결집시켰다. 그는 나를 Smart Guy라고 생각하는 교수 4명을 모았다. 학원에서의 정치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 교수는 자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기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협박했다. 그 교수를 잃기 싫어하는 학교당국은 교수회를 열어 나의 석사논문을 검토했다. 그리고 나를 옹호하는 교수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결국 조건부의 시스템공학 박사과정 입학이 허가됐다. 조건부란 시스템공학 핵심 과목을 1년간 집중적으로 이수한 후에, 성적이 좋으면 박사과정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학교 내에서 내 개인적 스폰서로 지정된 경제학과 Whipple 교수가 한국의 국방장관에게 나를 박사과정에 입교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의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이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먼저 마치고 귀국한 선배들, 한국 국내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선배들이 모두 국방부 PPBS실에 모여 있었다. PPBS란 맥나마라의 국방관리 기법이었다. 실에는 15명 정도의 선배들만 있었다. 이 실장이 바로 나에게 악몽을 가했던 육사12기 선배였다. 이들 중 한 고참 해병중령이 박사과정을 가겠다며 예산을 따 놓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교수가 국방부 장관 앞으로 보냈던 편지가 이 PPBS실로 이첩된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선배장교들이 나를 괘씸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내가 그 해병중령의 예산을 가로채려 했다는 것이다. “그럴 것 같으면 누구든지 박사 하게?” 그들은 이렇게들 수근거렸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던 나로서는 이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나는 귀국 후 곧바로 PPPS실로 출근하여 명랑한 얼굴을 해가지고 선배장교들에게 인사를 했다. 미국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려고 정신없었던 내가 어찌 국방부에 PPBS실이라는 조직이 새로 생겼는지, 그 안에 누가 있는지를 어찌 알 수 있을 것이며 더구나 해병중령이 박사과정을 가기 위해 예산을 따놓고 있는지를 어찌 알고 그것을 중간에 가로채려 했다는 말인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내가 모든 것 알고 있으면서도 그 예산을 가로 채려 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출근 첫날부터 모든 장교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아마도 내 명랑했던 얼굴을 놓고 천연덕스럽고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당시는 누구 하나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단지 먼 훗날에야 비로소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따가운 집단적 눈총은 1년 반 동안 계속됐다. 이런 기간에 나는 업무와 관련된 미국 문헌을 열심히 연구했다. 당시 세계적인 각광을 받던 국방경영 시스템 즉 PPBS(Planning Programming Budgeting Systems)에 관한 규정과 서적들을 대부분 독파했다. 외롭고 괴로울수록 책만 열심히 보았고, 그 결과 실력이 향상됐다. 신참 소령 때인지라 마음고생도 고생이지만 군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제대를 결심했다. 공인회계사 시험 문제집을 사다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막 속도가 붙을 때 국방과학연구소에 계시는 육사11기 선배님이 로비를 해서 나를 홍릉에 있던 국방과학연구소로 불러갔다. 그리로 자리를 옮겨 출근하기 시작한지 불과 1주일 만에 경천동지할 일이 생겼다. 나를 그토록 미워하던 PPBS실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해병중령이 미국의 여기저기에 백방으로 노력하여 입학허가서(admission)를 받으려 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예산을 반납해야 하고, 예산을 반납하면 행정상 골치가 아프고, 체면이 서지 않으니 나더러 9월에 시작하는 박사과정을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누군 박사 못해?” 큰 소리를 쳤다는 중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세를 180도 바꾸어 나를 위하는 척 하는 10년 선배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실장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했다. 박사를 따서 대통령이 된다 해도 새로 부임한 연구소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눈치 빠른 그 실장은 나를 연구소로 데려온 대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기회이니 후배의 앞길을 위해 나를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다. 연구소 직속상관인 그 선배님이 나를 설득했다. “마지막 기회이니 공부를 더 해봐” 나는 Whipple 교수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2일 후에 곧바로 연락이 왔다. “Congratulations, We are looking forward to seeing you soon.”(축하한다. 빨리 보고 싶다). 석사과정을 마친지 2년만이었다. 37세에 시작하는 만학은 이렇게 시작됐다. 석사 때, 나는 도서관 양탄자 위에 책과 학술간행물을 한 아름 찾아 쌓아놓고 기가 차서 울어 본 적이 있다. 아침 7시에 일어나려면 나도 모르게 “아구 아구”소리가 절로 났다. 하지만 박사과정에 와보니 그건 약과였다.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첫 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연중 내내 반팔로 지낼 수 있는 지중해성 기후였는데도 무릎과 발이 시리고 쩌릿해서 차라리 다리가 없는 편을 선택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뒷골이 무겁고 나른해서 잠만 쏟아졌다. 한국 교포로부터 몇 차례 침을 맞긴 했지만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 차례에 20달러씩 지불하는 것도 커다란 부담이었지만 가는데 20분, 오는데 20분, 침 맞는데 20분이라는 시간은 더욱더 감수할 수 없었다. 나는 침술사에게 사람하나 살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가 싸준 침 뭉치를 가지고 나는 거의 매일 침을 놓았다. 그가 가르쳐 준 요령에 따라 배, 손 그리고 발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배에 꽂는 실 침의 수는 30개 내외였다. 침을 맞으면 체력이 소모됐다. 가누지 못할 만큼 몸이 까부라졌다. 나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2층 계단을 내려와서는 비틀거려지는 몸을 가누며 뛰기 시작했다. 3년을 하루같이 뛰었다. 뛰고 나면 지쳤던 몸에 생기기 돌았다. 비가와도 뛰었고, 새벽 두 시에도 뛰었다. 매일같이 뛴다는 것은 체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태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하루를 거르면 열흘을 거르게 된다. 열흘을 거르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를 거르지 않아야 했다. 바로 이런 것이 극기였다. 그 결과 박사과정이 끝난 시점에서의 내 건강은 그때까지의 내 일생 중에서 가장 좋아져 있었다.
뛸 때에는 반드시 생각할 거리를 미리 준비했다. 뛰면서 수많은 수학 이론을 터득했다. 뛰면서 수학문제 푸는 과정을 칠판에 수학기호들로 표현한다면 칠판 한두 개쯤은 빼곡하게 들어찼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은 상상력과 논리력을 훈련시키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렇게 훈련이 되니까 교수가 칠판에 써 내려가는 수학기호들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훈련 때문인지 내게는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거나 밥을 먹으면서도 연상하고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새로운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나는 3-5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같은 이론이라 해도 이를 다루는 석학들에 따라 시각을 달리 하고, 다루는 요령 및 기법을 달리 한다는 것은 학문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이 희열은 주말 공부를 위한 충분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남들은 교과서 하나도 다 소화할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많은 책을 언제 다 보느냐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문이 주는 희열을 알지 못한 채 성적과 학위만 딸 뿐이다. 공부는 하지만 사고력을 다양하게 기르지는 못한다. 이러한 나의 공부 방법은 수학에 대한 해석력을 낭만적이라 할 만큼 풍부하고 화려하게 길러주었다. 1년 후의 결산결과 내 성적은 4점 만점에 3.92였다. 그래서 조건부 박사 후보생에서 정식 박사후보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나는 수학 책에서 제공하는 공식과 정리를 내 나름대로 소화했고, 그 위에 추가하여 내 나름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공식과 정리를 증명하는 버릇을 길렀다. 공식에 매달려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을 따로 만들어 가면서 공부한 것이다.
박사과정 필기시험을 친 세 명의 후보 중에서 나 혼자만 합격을 했다. 며칠 후, 박사 자격 구두시험이 열렸다. 다른 과 교수들을 포함하여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나를 공격하러 쳐들어 왔다. 수학과 교수가 Implicit Function Theorem을 간단히 요약해 보라고 했다. 고등 함수이론에서는 Implicit Function Theorem이라는 걸 배운다. 응용수학에서는 LP(Linear Programming)라는 걸 배운다. 나는 LP를 배우면서 그 속에 Implicit Function Theorem이 잉태돼 있다는 걸 발견했고, Implicit Function Theorem을 배우면서는 LP의 배경을 음미했다. 바로 이런 것이 학문에서 얻는 희열이었다. 나는 구두시험장에서 나를 공격한 첫 교수에게 LP의 기본철학을 요약하면서 “바로 이게 Implicit Function Theorem의 기본 개념”이라고 답했다. 교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처럼 생각해 본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확률통계학 교수가 물었다. “해군 장교들의 근무연한에 관한 확률분포를 얻으려 하오. 그래서 인사과에서 현역장교들을 표본으로 하여 그 장교들의 과거 근무연한을 표본(Sample)으로 하려 하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겠소?” 평소에 내가 늘 생각했던 문제여서 즉시 답에 나섰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Inspection Paradox라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Life를 가지고 전체 Life를 예측하는 데 따른 문제입니다. 예편한 장교를 표본으로 잡지 않고 현역장교를 표본으로 했다는 것은 Past Life에 대한 확률분포를 가지고 전체 Life에 대한 예측을 하려는 것입니다.” “우물에 수많은 머리카락이 가라앉았습니다. 그 머리카락을 모두 끄집어내서 일일이 재어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막대기로 물을 휘저었습니다.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머리카락을 막대기로 건져 올렸습니다. 막대 위에 100개의 머리카락이 걸렸습니다. 이걸 표본(Sample)으로 잡았을 때, 어떤 문제가 일어납니까. 그 샘플은 모집단(universe)을 과장평가(Overestimate)한 것이겠습니까? 또는 축소평가(Underestimate)한 것이겠습니까? 과장평가한 것입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길수록 막대기에 걸릴 확률이 그만큼 더 높지 않겠습니까?”
“현역을 샘플로 잡는 것도 똑같습니다. 현역으로 남아 있는 장교들은 예편한 장교들보다 군생활을 더 오래 할 확률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Over Estimate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현역에 있는 장교들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얼마나 근무했느냐, 즉 전생(Previous Life)의 길이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간 더 남아 있겠느냐, 즉 후생(After Life)에 대한 통계는 없습니다.” “이 천장에 전구가 있습니다. 이 전구를 언제 갈아 끼웠을까요? 기록을 보면 각 전구가 얼마나 오래 사용됐는지(Pre-Life)에 대한 통계 분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전구들의 미래는 어떨까요? 얼마나 더 오래 사용되다가 Life를 마칠까요?” “전구의 Life는 지수분포(Exponential Distribution)로 표현됩니다. 전구의 전생과 후생은 확률적으로 똑같습니다. 현역장교에 대한 기록은 전생의 기록입니다. 후생은 전생으로부터 예측될 수 있습니다. 전생과 후생을 합치면 바로 장교들의 복무기간이 됩니다.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교수들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기쁨의 웃음을 교환했다. 교수의 질문에 쩔쩔 맨 것이 아니라 교수들에게 그들이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접근방법을 강의한 꼴이 되었다. ‘Inspection Paradox’ 즉 ‘Length Biased Distribution’이라는 수학적 정리를 증명하는 절차는 매우 길다. 참고서 1쪽 짜리 분량이다. “그러면 Length Biased Distribution의 유도과정부터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교수들의 눈이 뚱그래졌다. 그렇게 긴 증명과정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는 의미였다. 나는 불과 3줄로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책에 없는 방법이었다. 전혀 Context가 다른 Renewal Theory로 접근했다. 오히려 교수들에게 강의하듯 했다.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면접시험이 끝나자 논문 지도교수가 자기 방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초조하게 가다린 지 20분 후, ‘지만원 박사위원회’ 6명이 일렬로 서서 들어왔다. 기쁨이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그들은 일렬로 서서 한사람씩 악수를 청하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축하합니다.” “20분간, 우리는 합격 여부를 논의한 것이 아닙니다. 합격에 이의를 표시한 교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이 학교 창설 이래 가장 훌륭한 면접시험을 치렀을 것입니다. 박사학생을 맡고 있는 교수들이 모두 다 자기 학생도 당신 같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부러워들 했습니다. 모두가 조언했습니다. 당신 같이 창의력 있는 학생을 어떻게 인도해야 훌륭한 논문을 쓰게 할 것인지에 대해.”
최근 들어 그 어느 박사 후보도 첫 번째 시험에 패스해 본 적이 없다는 이 과정에서 모범생으로까지 칭찬을 받으며 합격하다니! 어리둥절했지만 “내게도 이런 순간이 다 있구나!” 싶었다. 나보다 먼저 박사과정을 시작한 학생들, 모두가 두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 이들은 나보다 2-3개의 A학점을 더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부를 경제적으로 하다 보니 그들은 교수가 조금만 흔들어도 혼돈을 일으켰다. 내린 뿌리가 짧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던 2m 키를 가진 Richard 교수가 논문지도를 맡았다. 정리(Theorem)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는 앞이 막혔다. 며칠 간 쉴 틈 없이 골몰했지만 한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새벽 두 시에 잠을 청해 자다가 새벽 다섯 시에 꿈을 꾸면서 그 문제가 풀렸다. 꿈에 문제를 푼 것이다. “리뉴얼 이론, 아이겐 밸류 및 아이겐 벡터!”, 나는 일어나 신들린 사람처럼 정리(Theorem)에 대한 증명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옛날 석사과정에서 수학과 교수로 고급 함수이론을 강의했던 ‘닥터 위어’(Weir), 그는 카네기멜론을 나온 수재였다. 모든 교수들이 다 박사학위를 가진 닥터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를 ‘프로페서 위어’라고 부르지 않고 ‘닥터 위어’라고 불렀다. 그가 강의하는 모습은 차라리 명배우의 연기에 가까웠다. 모션 모션이 그야말로 멋쟁이였고 강의가 그야말로 각본처럼 빈틈이 없었다. 어느 날 그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꿈속에서 문제를 풀었다고 말해주었다. 연기가 뛰어난 교수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저 교수, 뻥이야 뻥” 이렇게 치부했다. 내가 꿈속에서 문제를 푼 바로 그날, 나는 가장 먼저 ‘닥터 위어’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당신처럼 꿈에서 문제를 풀었다고 말해주었다. 전화를 받은 그는 원더풀을 연발하면서 축하를 해주었다. 그 교수 역시 나를 열렬히 지지해준 교수들 중의 한 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리한 증명 방법을 지도교수에게 전달하는 데 문제가 생겼다. 책에 소개돼 있는 공식은 한 줄인데 내가 나름대로 유도한 공식은 세 줄이나 됐다. 같은 공식인데 어째서 1줄짜리 공식과 3줄짜리 공식이 같은 것이냐 하면서 교수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수학 기호들의 생김새에 비슷한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고유의 그림 그리기 방법대로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숫제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논문지도 교수인 그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야릇한 표정까지 지었다. 한 줄짜리 공식을 가지고는 내가 증명하고자 하는 정리(Theorem)를 증명할 수 없지만, 내가 새로 만들어 낸 3줄짜리를 가지고는 깨끗하게 증명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를 설득시키려 하면 예기치 못한 불화로 진전될 것 같아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차를 타고 오면서 나는 그 교수를 “돌머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화가 나서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나만 아는 방법을 강요하려 하지 말고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라플라스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일종의 수학적 거울이 떠올랐다. 1줄짜리 공식을 라플라스 함수로 전환하고, 또 3줄짜리 공식도 라플라스 함수로 전환해서 라플라스 언어로 표현된 두 개의 상이 라플라스 거울에서 똑같은 것으로 나타나면, 밖에서 서로 달라 보이는 두 개의 공식은 같은 것이라는 ‘정리’(Uniqueness Theorem of Laplas Transformation)가 있다. 즉 두 개의 달라 보이는 공식을 현실 세계에서 비교해 보면 서로 달라 보이지만, 라플라스라는 거울에 비춰 보니까 거울에 나타난 상이 똑같다는 것만 증명해 보이면 되는 것이었다.
전략을 이렇게 짜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들린 듯이 라플라스 폼으로 두 개의 공식을 전환시켰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을 교수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결과를 말해줬다. 교수는 축하한다 하면서도 벌레 씹은 어조였다. 결국 그는 내가 유도하는 과정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나름의 공식 유도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교수뿐만이 아니었다. 국방과학연구소를 떠나 만 33개월 만에 나는 박사논문까지 아무런 잡음 없이 깨끗이 마쳤다. 이제 논문을 꺼내놓고 찾아보니 세상에 없는 수학공식 2개, 수학정리 6개, 알고리즘 1개가 들어있다. 1980년 9월 30일, 대학원 졸업식에는 수백 명의 석사들이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박사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와 함께 박사학위를 받기로 예정됐던 다른 3명의 후보들이 졸업식 바로 전날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모두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박사학위 대신 석사학위를 받았다. 두 부인들이 자존심에는 아랑곳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한동안 울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은 미 공군 소령으로, 3년 내내 내게 늘 가정교사처럼 도움을 주었던 사람으로 나보다 실력이 월등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소령은 6개월 후에 성공했다. 졸업식 날, 길에서 만나는 외국인 가족들이 한 결 같이 입을 모아 나를 알아보면서 축하의 인사들을 했다. “오늘 졸업식은 모두 당신의 것이었습니다.”(The ceremony was all yours). 이는 내가 국제 장교들과 한데 어울리며 살아가면서 우정을 주고받으며 그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인 끝에 이루어낸 한 작은 승리였다. 내가 만든 수학 공식, 정리, 알고리즘은 각기 나의 성을 따서 ‘Jee's Formula’, ‘Jee's Theorem’, ‘Jee's Algorithm’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후 나는 그 학교에서 전설적인 케이스로 전해지고 있다.
* 문과분야 석사과정에서 이과분야 박사과정으로 변신한 첫 케이스,
* 평균 학점 3.8 이상만 박사과정에 받아주는 콧대 높은 학교에서 동양계 학생으로는 처음 으로 박사를 한 케이스,
* 새로운 공식과 새로운 정리를 8개씩이나 실은 논문을 쓴 케이스,
* 여러 분야 교수들이 모여 희한한 질문을 하는 박사자격 구두시험에서 자유분방하고 다양 한 이론과 해석으로 교수들을 즐겁게 해준 첫 케이스로 회자됐다.
직관력(Intuition)
내게 장점이 있었다면 바로 일류 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3류 학교나마 꾸준히 다닐 수 없었던 잡초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혼자 상상하고 혼자서 깨우치는 훈련을 했기 때문에 응용능력이 길러진 것이다. 그들보다 덜 배웠고, 문제 푸는 속도가 느리고, 그래서 대입성적이 다소 낮았겠지만 생각하는 능력만큼은 그들보다 우수했을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소화능력을 기르는 것, 바로 이것이 공부가 아닐까. 인체의 소화능력은 조직체 스스로가 가지고 있다. 약품은 단지 조직체의 소화능력을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데 있다. 공부도 이래야 한다. 미지에 대한 개척능력, 새로운 것에 대한 소화능력은 본인 스스로 키워야 한다. 단지 선생님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식 교육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창의력을 기르려면 오히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창의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라면 학생 스스로 파고들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줄 것이다. 파고든다는 건 내용을 훤히 이해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론의 밑에 깔린 철학을 개발해 음미를 해야 한다. 교과서와는 다른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똑같은 공식이나 정리를 증명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개발해야 한다. 요점을 정리하여 손에 익숙 시켜야 한다. 손이 생각을 따라주지 않으면 표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없다.
이해만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수학의 철학적 메커니즘을 핏속에 용해시켜 상식세계로 전환해야 한다. 모든 수학적 공식과 정리에는 물리적 해석(physical interpretation)이 따라야 한다. 영어회화를 배울 때, 책에서만 달달 외우다가 미국에 가면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는다. 표현 하나하나를 외울 때마다 실생활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과 장면을 매치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국에 가서 비슷한 장면이 나올 때 즉시 영어 표현이 나온다. 수학도 이와 꼭 같다. 수학세계를 현실세계로 매치시키지 않으면 그 수학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수학공식과 정리를 노트나 책에서만 푸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현실세계에 끌고 나와 해석하고,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직관’(Intuition)은 이러한 과정에서만 자란다. 직관력을 키우지 못하면 발명 능력도 없다. 이를 더러는 훈련된 예측력(Educated Guess)이라 부른다. 배우고 음미하고 터득하려는 노력은 예리한 직관을 키우는데(Sharpen Intuition) 절대적인 과정이다. 공식을 재창조(Regeneration)하고, 응용하고, 새로 만들어 내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는 사람은 공식을 숭상하고, 일생 내내 남이 만들어 낸 수학 모델만 찾아 헤맨다. 수학공식, 정리(Theorem)는 훈련된 예측(Conjecture)에서 출발한다. 그 예측을 증명해 나가는 것이 수학적 발명이다. 통계학의 ‘회귀분석’(Regression Analysis)이나 ‘LP’, 이공계를 공부한 이들은 이런 것들 쯤은 다 안다 할 것이다. “아, 그런 거? 아주 기초적인 것이지”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껍데기만 공부한 사람이다. 그들이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위 두 가지는 엄청난 철학적 의미, 광범위한 개념 및 응용분야를 잉태하고 있다. 간단한 절차와 요령을 원숭이 식으로 배운 후에 그걸 주제의 전부라고 아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1980년 9월 미 해군대학원 O.R 박사학위 수여 장면
학문에 첩경은 없다. 왕도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단거리 경쟁을 연속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장거리 경쟁으로 틀을 잡았다. 좋은 점수를 목표로 한 게 아니라 좋아하는 과목에서 희열을 느끼며 시간에 대한 계산 없이 몰두했다. 몰두하다보니 직관력이 길러졌고, 그 직관력에 의해 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나타나는 사회현상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석을 내리며 일반상식과는 다른 지만원 식의 처방을 내린다. 개선은 과학이다. 과학의 기초는 관찰이다. 이론(Theory)이 없는 관찰은 개선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론 없는 경험도 그렇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본 것’이 다르다. 각자는 머리에 들은 것만큼만 보는 것이다. 직관력을 기른 사람이 한 시간에 볼 수 있는 것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일생 내내 보지 못할 수 있다. 체계적인 이론은 없지만 한 분야에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 이런 이들을 더러는 전문가라고 부르지만 나는 원주민이라 부른다. 비록 많은 사정은 알고 있지만, 발전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토박이에 불과한 것이다. 때때로 접하는 기업체 주인들에게 나는 말한다. “남이 풀다 풀지 못한 문제가 있으면 제게 가져와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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