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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만은 밥벌이 수단으로 택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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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7 15:46 조회10,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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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터레이 반도(Monterey Peninsula)에서 보는 태평양은 특별히 아름다워 보였다. 유난히 희고 길게 이어진 파도, 넘실거리는 검푸른 물살, 타조 등처럼 생긴 그 지역 특유의 사이프러스 나무, 불타오르는 듯 붉게 깔린 레드 카펫, 병풍바위로 둘러싸인 천야 만야의 낭떠러지 밑에 넘실거리는 검은 물결, 긴 선으로 뻗어간 백사장, 사람을 향해 먹이를 달라는 물개들, 파도에 몸을 내맡긴 채 한가롭게 누워서 조개를 깨먹는 능청스런 바다 수달피들, 사람만 나타나면 먹이를 달라고 두발로 일어서서 손을 벌리는 다람쥐들, 해안을 따라 열 시간을 달려도 달리는 곳마다 특유의 장관을 연출했다.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이다 보면 다람쥐들이 나와 사람들 손끝에 코를 갖다 대고 먹을 것을 구한다. 손바닥에 먹이를 놓아주면 손처럼 생긴 두 개의 앞다리로 먹이를 움켜쥐고 사람처럼 일어서서 앙증맞게 먹는다. 어쩌다 한국 아이들이 이런 곳에 들르면 주위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다른 생명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아이들에게 커다란 모션이나 빠른 모션을 쓰지 못하게 가르쳤다. 큰 소리로 말하면 다람쥐가 놀란다며 귓속말로 주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주의를 주지 않았다. 몬터레이 반도에 이 지역 주민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매우 훌륭한 병원이 있다. 복도에는 물론 구석진 곳 어디에서나 티끌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화장실이나 부엌에서는 윤이 반짝이며, 정결한 유니폼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오는 손님을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 병원에서는 통상 한국 여성들이 청소에 고용되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하여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혹사당했다. 청소에는 약품들이 사용되고 청소 후에는 소독약들이 뿌려졌다. 병원은 그야말로 무균 지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라는 개념은 미국에 없다. 일단 입원하면 모든 시중은 간호원이 든다. 하다못해 환자를 방문한 가족들이 환자의 요청으로 침대를 세워줘도 주의를 받는다. 간호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허락 없이 환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도 안 된다. 환자실에 마실 것을 사가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국 병원과 미국 병원과의 차이는 이런 외형에서부터 관찰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의 느슨한 자세에 비하면 미국의 의사나 간호원은 혹사에 가깝도록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환자에겐 언제나 극진하고 상냥했다. 환자에 대한 배려는 미국인들에게 체질화돼 있었다. 병원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란 토끼눈을 해 가지고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정지하여 엘리베이터를 비워주었다. 도로에서 병원차가 사이렌을 울리면 모든 차량이 옆으로 붙어 기어갔다. 환자를 보면 모든 시민이 시간과 공간을 양보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보름을 지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농촌지역을 지나는데 농촌 트랙터가 느린 속도로 지나가자 교차로에 있던 모든 승용차들이 10분씩이나 기다려 주었다. 승용차들이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는데 왜 모두 서서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물었더니, 농촌에 와서는 농촌 사람들에게 예의를 표해야 하는데 바로 이렇게 기다려 주는 것이 그런 예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사관학교라는 요람에서 포근히 지내다가 졸업을 하자마자 곧바로 월남 전쟁터에 가서 42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받았던 친절과 배려가 나에겐 민주시민의 기본 에티켓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도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해 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한국 사람들을 접하면서부터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면서도 마치 이민족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외국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러한 느낌은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문화적 충격(Cultural Shock)이란 통상 한국에서 살다가 외국으로 갔을 때 첫날 겪는 충격을 일컫는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서울로 왔을 때 문화적 충격을 겪었다. 살아있는 생명은 존중돼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이 말은 피부에 와 닿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나는 생명과 인권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별로 받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병아리를 사다가 2층에서 떨어뜨리며 누구의 병아리가 살고, 누구의 것이 죽느냐를 놓고 내기를 했다. 여름 방학이면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며 곤충을 마구 잡아 죽였다. 이런 아이들이 커서 한국의 의사가 되고 법관이 되고 정치인이 된다. 동물을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자란 미국의 어린이들은 자라서 미국을 인권국가로 만든 반면, 그렇지 못한 한국의 어린이들은 자라서 남을 배려하지도 않고, 남의 인권을 예사로 유린하는 것이 아닐까?


나에겐 꼬마 아들이 하나 있었다. 초등하교 나이에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면 못 들은 척 했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들은 한 결 같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손목시계를 좌우로 이동시키면서 소리 나는 쪽의 손을 들어 보라 했다. 센스가 빠른 꼬마는 잘 알아맞혔다. 나는 귀국 3개월 전에 논문심사를 마쳤다. 귀국하기 전에 녀석을 육군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사가 녀석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비위를 맞춰가면서 청력 테스트실로 데려갔다. 한번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청력을 테스트했고, 또 한 번은 귀뿌리 뒤에 있는 뼈에 부착해서 체크했다. 시험결과를 손에 든 병사는 꼬마가 청력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는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의사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물으니까, 귀의 내부 시스템엔 이상이 없는데, 외부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이 병사보다 못했다. 테스트 결과를 살펴본 육군 병원 의사는 2시간 이상 떨어진 오클랜드 해군병원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병원규모를 보면 육군병원이 컸지만 해군병원은 소수의 어려운 환자들만 취급했다. 병원에도 계급이 있었다.


해군병원 소령 군의관이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입원실로 들어왔다. 귀의 구조가 자세하게 그려진 큰 그림을 가지고 병의 성격, 수술 절차, 위험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의사를 신뢰한 나는 “내 아들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의사는 이 말을 경건한 자세로 듣고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무겁게 대답했다. 이튿날 수술을 했다. 고막에 머리카락처럼 가는 파이프를 박는 수술이었다. 그 파이프를 통해서 고막 안에 고인 물을 밖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수술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체크해 보니 실망스럽게도 수술이 실패한 것으로 판명됐다. 다른 의사가 또 수술을 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이 두 의사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떨구며 사과를 했다. “물론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우리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동부에서 참으로 훌륭한 의사가 왔으니 또 한 번 더 맡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로 부임한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오자 다른 남녀 의사들이 마치 여왕을 모시듯 줄줄이 뒤따랐다. 선임 의사가 현미경을 환부에 고정시켜 놓고는 다른 의사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자, 보시오. 이게 바로 retraction attics의 definition(정의)입니다.” 현미경은 하나이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양쪽에서 환부를 볼 수 있었다. 의사들은 돌아가며 환부를 관찰했다. “이 아이의 귓속에 세포 가루가 쌓이고 있소. 많이 쌓이면 신경을 눌러서 안면근육이 마비됩니다. 물론 이 아이의 귓속에는 물이 고이고 있소. 그 물이 청력을 상실케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단순히 귓속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꽂아 물을 뽑아낸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오. 이 아이의 병은 심각하오. 이 아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낼 순 없소. 나는 한국 의사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소. 내가 수술을 해야 하오.”


가장 빨리 날짜를 잡아도 한 달 후여야 했다. 그런데 나는 한 달 후에 귀국을 해야만 했다. 아이 수술 때문에 귀국을 연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수술 의사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의사님. 이 애 아버지는 군인이라 한 달 후에 서울로 귀국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선임의사가 화를 내면서 말했다. “나는 이 애의 아버지 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애의 병을 내가 아는 이상 그냥은 보낼 수 없습니다. 이 아이를 한국 의사에게 맡길 순 없습니다.” 난처해진 첫 번째 수술의가 내 어깨를 짚었다. “지선생님, 이 꼬마를 내게 맡겨놓고 가십시오. 제가 후속 조치까지 완료하여 김포공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 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잘 어울려 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임의사가 수간호원에게 수술 스케줄을 보자고 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을 점검하더니 어느 환자와 수술 차례를 바꿨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이 아이를 수술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고, 첫 수술의가 내게 축하 악수를 청했다. 다음날 아침, 수술실로 들어가는 꼬마 녀석이 불안해했다. 선임의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의사와 똑같이 수술의를 입고, 신발을 신고, 입마개를 하고 모자를 쓴 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빠, 나 수술할 때 아빠가 같이 있어줄 거지?” “그럼, 아빠가 이렇게 손잡고 지켜줄게. 걱정 마.” 언제나 아빠를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온 사내 녀석은 아빠의 동행 사실에 안심을 하는 듯 했다. 의사가 고깔 콘 같이 생긴 하얀 플라스틱을 코에 댔다. 녀석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사가 말했다. “He is gone”(잠들었다) 수술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자동 유리문 밖에 의자를 놓아주면서 거기에 앉아 안의 수술 장면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배려였다. 수술대에서 같이 수술을 하던 여의사가 간간이 내 쪽으로 다가와 유리문을 통해 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며 윙크를 보냈다. 수술이 잘 진행돼 간다는 신호였다. 환자의 아버지까지 이렇듯 극진히 배려하는 이들에서 나는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밤이 되자 나는 아이 옆을 떠나야 했다. 간호사들이 염려하지 말고 숙소에 가서 편히 쉬라고 했지만, 영어가 서툰데다 목이 아픈 아이를 그냥 남겨둘 수 없었다. 나는 쪽지에 글을 썼다. 아이가 밤에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서 좌측에 쓰고, 오른 쪽에는 영어로 번역을 해 놓았다. 녀석이 왼쪽에서 필요로 하는 걸 찾아 그 번호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간호원이 오른쪽에서 영어로 아들 녀석이 원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에게 사용법을 교육시켜 놓은 후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튿날, 회복실에 갔더니 5-6명의 간호원들이 일제히 다가와 내 앞에 서서 이구동성으로 원더풀을 연발했다. 어떻게 그런 쪽지를 마련할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그 쪽지가 없었다면 간호원도 내 아이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언제나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해맑은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 그들은 심하게 혹사당한다고 할 만큼 바쁘게 뛰어다녔다. 특히 의사들은 수술실, 진료실, 세미나실을 뛰어다녔다. 걸어 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세미나실에는 세미나가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준비돼 있어 틈나는 대로 찾아가 보았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서다. 의사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가, 또는 퇴화하는가? 한국에서는 수술을 많이 하는 것이 의료 기술을 향상시키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의사의 실력향상을 위해 실험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1982년, 국방연구원에 있을 때 나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월터리드 육군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의 실력을 어떤 식으로 향상시키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에겐 시스템이 있었다. 병원, 연구소, 학교가 한 울타리 내에 있었다. 의사는 이 세 개의 분야를 로테이션으로 옮겨 다녔다. 통상 3년마다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진료 시에 가졌던 의문을 연구소에 가서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학교에서 강의하며, 정리된 실력을 가지고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다고 했다. 이런 순환 시스템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 자동적으로 실력이 배양되는 것이었다.


1980년 10월, 나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가까이 지내던 7년 선배 댁을 찾았다. 그들은 아들을 의대에 보내고 싶은데 말을 통 안 듣는다며 설득 좀 시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그 학생을 그의 방으로 데려가 이런 저런 미국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님이 의대를 가라 하시던?” “지겨워 죽겠어요. 의대는 죽어도 가기 싫거든요. 우리 부모님 좀 설득해 주세요.” “그럼, 그렇게 하고말고. 그런데 부모님은 왜 너더러 의사가 되라 하시던?” “생활이 안정된다는 거지요. 돈을 잘 버니까요.” “야, 그렇다면 절대로 의사는 되지 마라. 세상에 할 일이 널려 있는데 하필이면 왜 하기 싫은 걸 꼭 해야만 하니? 우리 한국 부모님들, 참 문제가 많다니까!” 의외로 자기편을 들어주니까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 해군병원에서 관찰했던 의사들의 실상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식을 의사에게 맡길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니. 의사의 능력이 무한할 때 얼마나 구세주 같이 느껴지겠니. 능력 있는 의사, 참으로 성스럽게 보이더라. 그런 의사가 바로 하느님이더라. 그런 의사가 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자다가도 뛰어 나가야 할 만큼 자기 생활을 포기하면서 오직 타인들의 생명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해. 이러한 각오 없이 단지 안정된 직업과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의사를 선택하는 것은 범죄행위야. 돈을 벌려고 종합병원에 출근한 월급쟁이 의사에게 환자가 밀어닥치면 얼마나 짜증나겠니? 환자에게 불친절한 의사, 짜증을 내는 간호원은 100% 다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선택했을 거야, 월급만 보이는데 환자가 사람으로 보이겠니? 능력이 모자라거나 희생정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직업은 다 가져도 좋으니 제발 의사만은 되지 말아야 해. 의술 공부에 혼을 빼앗길 만큼 그것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생활에서 자기만족과 성취감을 느낄 자신이 없으면 부모님이 뭐라 하시든 절대로 의학은 하지 마라.”


그 후 여러 해가 흘렀다. 우연히 소식을 들으니 그 아이는 한양의대를 나와 개업의사가 되어 있었다. 만일 내가 그의 부모 편을 들어 의대에 가라고 설득했다면 아마도 그는 의사의 길을 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사의 능력향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의료 시스템 개선이다. 미국의 육군 연구소는 3백 마리의 양을 실험용 산에 풀어놓고 포탄을 발사했다. 불쌍한 양들은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즉사하기도 했다. 연구소는 각 부상 부위별로 죽어 가는 시간을 측정했다. 이는 전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부상자들에게 후송 및 치료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은 현장의사를 하나의 과정으로 설치하여 양성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사고 현장에 나가 될수록 많은 응급치료를 하면 그만큼 생명이 연장된다. 후송 도중 의사는 병원을 선정하고, 그 병원에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무슨 조치부터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명령을 내린다.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도 설치돼 있다. 환자에게 단 1초의 시간이라도 더 절약해 주려는 노력인 것이다.

환자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박대당하다가 죽어 가는 한국인의 생명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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