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1-06-11 (독자) 칼럼.논단 06면 45판 1687자
한국 영해를 북한 상선이 마음껏 드나들어도 우리 군이 원칙에 따른 대응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가장 핵심은 상대가 바로 민간선박이란 점 때문이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간단하다. 정선을 명하고 나포하든가 선박의 앞쪽에 발포해 영해 침범을 막으면 된다. 하지만 누구도 노골적으로 “왜 쏘지 못했느냐”고 말하지 않았다. 왜? 아무리 교전수칙이 있다고 하지만 비무장 상선에 발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딘지 찜찜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시험을 북한군은 ‘원칙’으로 응수했다. 지난 5월 28일 우리의 82t짜리 꽁치잡이 어선이 조류에 떠밀려간 어망을 건지기 위해 NLL을 2마일 넘었다 해서 북한 무장선으로부터 7~8발의 총격을 받았다. 이제 정부는 이 같은 북한의 행위에 대해 뭔가 말을 해야 한다. 누가 인도주의적이고 누가 야만적이냐며 따지기 전에 그로 인한 국민의 피해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지난 3일 정부가 내놓은 대책대로 ‘사전 통보’를 전제조건으로 제주해협이 북한 상선에 개방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상상을 초월한다. 설사 북한 선박들이 NLL을 침범해도 문제삼을 수 없게 됐다. 그동안 제주해협은 북한 공작선이 한국 또는 중국 어선을 가장하여 침투하기 좋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매일 400~600척의 수많은 선박들이 활동하고 있는 그곳을 공식적으로 내주면 북한은 그곳에 무엇이든 다 숨길 수 있다.
수많은 어선 밑에 많은 잠수정, 심지어는 해군 잠수함까지 숨겨 다닐 수 있다. 북한 해군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바다가 동서해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서해에 있는 함정이 동해로 가려면 제주도 남쪽 공해를 돌아가야만 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한국 해군은 지리적으로 동서남해를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엄청난 이점을 누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입지가 거꾸로 바뀌었다. 동해와 서해에서 공히 NLL 이북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북한 함정들이 이제는 버젓이 대양해군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 일부 군함을 상선으로 위장하는 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기본전술이다. 상선이 떼를 지어 다니면 그걸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이 끼어다닐 것이다. 이 또한 막을 명분이 뚜렷지 않다.
결국 한국해군은 연안에서만 헤엄을 치고, 북한 함정은 대양에서 활개를 치며 한국해군을 연안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됐다. 한국해군은 그동안 예산이 모자라 연안해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연안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제주도 해협을 내주고 그곳에 해군력과 공군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제주도 해협은 실질적으로 우리 영해가 아니라 북한 영해가 돼 버린다. 당장 우리 해군 군사력의 상당부분이 그곳으로 이동 배치돼야 한다. 제주도에 해군 함대사령부를 옮기고 거기에서 출동하면서 해협을 감시해야 한다.
수조원 규모의 감시장비를 구매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 해도 개방하기 이전의 안보는 유지될 수 없다. 직관적으로 판단해도 병력이 5000명 이상 늘어나야 한다. 군은 대잠초계기, 레이더, 군함을 더 많이 사겠다고 말한다. 북한은 내일부터라도 통보만 하면 제주해협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감시대책은 적어도 5년 이상 걸려야 한다. 그래도 개방 이전의 안보를 회복할 수 없다.
한국의 제한된 해군력이 제주도로 집중되면 북한 해군을 견제할 해군력이 대폭 축소된다. 북한은 상선 몇 척으로 한국해군의 30%를 묶어두는 결과를 얻었다. 손도 대지 않고 한국 해군을 무력화시킨 엄청난 전략적 ‘폭리’를 하룻밤 사이에 달성했다. 한국 군, 나아가 정부의 대응이 궁금하다.
지만원/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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