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1-12-28 (독자) 칼럼.논단 07면 45판 1800자 일본 순시선과 괴선박 간의 전투는 이를테면 ‘활과 기관총’간의 싸움이었다. 괴선박은 17일 남포항을 떠난 이후 미국과 일본의 영상정보 수집 및 통신감청에 의해 움직임이 파악됐다. 일본 순시선은 31시간 동안 ‘고양이가 쥐를 갖고 놀듯’ 괴선박을 요리했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촬영한 화면은 적나라하게 이 장면들을 보여준다. 일본 순시선에는 자이로와 전자 로직(Logic)으로 구성된 사격통제 시스템이 설치돼 있어서 배가 요동을 쳐도 포구(포구)는 목표물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괴선박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었다. 배가 흔들리면 총구가 마구 휘둘린다. 일본과 북한 간의 격차였다. 바로 이러한 격차가 한·일 간에도 존재한다. 일본의 재무장을 경계하자는 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번에 일본이 보여준 정보전 능력과 전자전 능력은 한국군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발전해 있었다. 게으르게 잠만 자면서 앞서가는 일본만 못마땅해 한 꼴이 됐다.
괴선박은 출발시부터 미국의 정찰 위성에 추적됐다. 항로와 영상정보를 일본 방위청에 연결해 주었고, 방위청은 교신 내용까지 입수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와 대잠초계기 P-3C가 괴선박을 발견했고, 이들의 유도에 따라 고속 순시함이 출동하여 괴선박을 추적했다. 미·일 간의 이러한 공조는 일본이 미국과 나란히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엄청난 위상에 진입해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한국군에게는 이런 게 없다.
1996년 9월 18일 강릉 해변에 좌초한 북한 해군 잠수함을 발견한 것은 ‘첨단무기’가 아니었다. 택시 기사였다. 1998년 6월 22일 속초에서 잠수정이 어망에 걸릴 때까지 군은 몰랐다. 한 대에 1억달러가 넘는 P-3C 대잠 초계기 4대만 사주면 모든 걸 다 잡을 수 있다더니 막상 사태가 터지자 군 수뇌는 잠수함과 잠수정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으니 무기를 더 사달라고 했다. 10조원이 넘는 엄청난 돈을 주고 잠수함, P-3C 대잠초계기, 해상 초계기를 샀지만 그런 장비와 무기들이 북한 선박을 탐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소식은 없다.
탐지 확률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항로개발은 무시한 채 이리저리 운전만 하고 다닌 것이다. 미국에 대한 정보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백두사업(통신감청 정찰기 도입사업), 금강사업(영상정찰기 도입사업)에 50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였지만 린다 김 사건으로 과연 얼마만큼 정보능력이 향상됐는가에 의문이 남아 있다. 전쟁이라고 하면 누구나 물리적 파괴력부터 연상한다. 이를 하드 킬(Hard-Kill) 무기라고 한다. 하지만 물리적 파괴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소프트 킬(Soft-Kill) 무기다. 정보전과 전자전 수단이다.
Hard-Kill 용도의 최신장비는 돈만 주면 사서 운용할 수 있지만 Soft-Kill 용도의 첨단장비는 돈을 주고 사온다 해서 저절로 운용되는 게 아니다. 통계학과 전자공학을 전공한 두뇌들로 구성된 두뇌본부가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한국군은 장비만 구입했고 두뇌본부는 설치하지 않았다. 마치 X-ray 장비와 촬영 기사만 확보하고 이를 판독하고 처방하는 의사를 확보하지 않은 병원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한국군은 사업비 규모가 큰 사업에는 많은 관심을 보인 반면, 정말로 전투력 발휘에 필요한 조치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막아온 것이다. 군전력증강 사업의 사업비 규모는 부정과 비리의 규모에 비례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사업비 규모가 큰 차세대 전투기(F-X) 사업 등은 서두르면서 사업비 규모가 작은 AWACS 사업에 대해서는 질질 미루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군은 늘 디지털 시대의 군을 만든다고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과 나란히 정보 공조를 할 만큼 발전해오는 동안 한국군은 ‘철통 안보’라며 입으로만 안보를 했다.
지만원/ 군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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