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영웅"
[박정희를 변호한다!] '대일청구권 자금'의 POSCO 투자는 '잘한 일'
지만원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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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대일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등의 건설에 투자했다. 사진은 포항제철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 지만원 박사는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고 전제하고 "일제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지 박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변호하는 긴 글을 본지에 보내왔으며 이에 그 전문을 게재한다. 참고로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린다 <편집자주>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였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천만 달러, 유상 2천만 달러 총 5천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서는 마치 선진국들의 은행이 기업 프로젝트에 자금을 빌려준 후부터 자금 사용 과정을 감시하듯이 일본 역시 빌려주는 돈을 받지 못할까 봐 사용과정을 감시했다.
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19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 자금 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천1백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백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백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백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천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천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천8백68만 달러 등 총 1억1천9백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천2백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 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천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천3백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천9백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은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일본의 소니사는 아키오 모리타가 이룩한 신화였고, 파나소닉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이룩한 신화였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 모리타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가론 유다 같은 이런 인간들에 대해서는 입에 들어가는 밥숟갈마저 빼내고 싶어진다.
일제강점 공간의 조선왕국
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를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당시 이러한 나라라면 누구에게든 먹힐 수밖에 없었다.
1905년 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당시 조선을 일본이 먹지 않고 러시아나 중국이 먹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왕 먹힐 바에야 일본에게 먹힌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러시아와 중국은 일본인들보다 더 잔악하게 욕을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일제치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선악 구별이 반듯하고 도덕심이 강했다. 일본인 교사들 중에는 나쁜 이들도 있었지만 존경을 받는 교사들도 많았다 한다.
5천년 역사! 9천여 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0%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1945년에서 1959년까지의 15년간,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연평균 1억8천만 달러. 현금이 아니라 물자였다. 정부는 미국에서 받은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 등을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웠다. 기업이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가 피똥을 누는 환경하에서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잉여농산물 유입은 농촌을 피폐화시켰고, 젊은이들의 이농현상을 초래하여 수백만의 실업자를 유발했다.
해방 이래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나마의 대기업들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 가는 돈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하고 정경유착으로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사기꾼 같았다.
1961년, 박 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그의 메모식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 달러와 무역적자 5천만 달러를 합쳐 3.3억 달러를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 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 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천 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사를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백 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천 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 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백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백70달러, 태국 2백20달러 등 이때 한국은 68달러였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다 팔았다.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였다. 세계가 놀랐다. 그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 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 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 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에서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썼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투쟁,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투쟁, 1969년 험프리 미 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 반대 투쟁, 1969년 7월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 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 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 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합법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나긋하게 얇아져 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월남 파병의 기적
1966∼72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천2백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천8백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72간 외자 도입액은 32억8천8백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천6백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천1백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중단액이 9천3백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만7천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 봉급 83년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장장 14년간의 교섭 끝에 1965년 6월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즉 무상원조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외환 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 보유고는 겨우 1억2천8백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천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천만 달러로 폭증했다. 남북한 1인당 GNP를 보자. 1953년, 남북한 1인당 GNP는 각기 67달러와 53달러로 남한이 1.2배 더 높았다. 그러나 1959∼65년 6년간에는 역전됐다. 남한이 북한의 60∼70% 수준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월남이 패망한 1975년에는 남한이 북한보다 1.4배 앞섰고, 지금은 29배로 앞서가고 있다.
한국군은 월남의 8개 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공사 5백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백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 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이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 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
1965∼75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천4백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천9백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천만 달러, 77년에는 33억8천7백만 달러, 78년에는 79억8천2백만 달러를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 보라. 그 엄청난 기술과 해외수주 기록을 가지고도 지금 현대를 비롯한 한국의 모든 건설업이 중동 수주에 냉대를 받으면서 줄줄이 도산하고 있지 않은가?
박 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 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박 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일자리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보릿고개'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천30달러, 우리의 11분의 1이다. 인도네시아는 9백68달러, 태국은 1천9백40달러, 북한은 5백80달러, 한국은 1만7천 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까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
일자리 만들기, 누구도 흉내 못내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첫째, 그는 기능학교들을 만들어 기능공을 대량으로 길러내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이들 기능공들의 친구가 됐다. 기능공들은 국제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었다. 매년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대학 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받는다"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 호소했다. 박 대통령의 약속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둘째, 그는 한편으로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쓰여진 기술자료(TDP)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 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 있는 광활한 도로 폭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릅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빠듯한 나라 살림에서도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 대통령을 만나기를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의 대통령들에게는 과학이 입으로만 중요했다.
국가경영 능력만을 보면 박 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 있다.
반면,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를 보자. 공공근로 사업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세금을 배급해 주었다. 들에 가서 풀을 뽑고 코스모스를 심으면서 절반 이상을 놀다가 오면 하루에 2만2천원을 주었고, 산에 가서 나무를 벤다며 소주 마시고 낮잠을 자다 오면 3만7천원씩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버니까 이들은 공장이나 들에 나가 힘들게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대중의 일자리 만들기는 사실상 일자리 죽이기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무너진 기업 수는 사상 최고에 이르렀고, 김대중은 기업 죽이기의 명수였다. 시쳇말로 잽도 안되는 매국-빨갱이 정치꾼이 배우지 못한 무리들을 이끌고 박정희를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
“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 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 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값을 의미했다. 주고받는 것은 손뼉이 마주쳐야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일본인들이 제로 전투기를 만들고, 항공모함을 만들어 미국에 대적했을 때까지도, 조선은 손바닥만한 창경궁에서 서로 모함하고 모략하면서 싸움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로와 도로, 그리고 지금까지도 끄떡없이 공고하게 유지되는 교량과 터널, 항만, 발전소, 비행장을 당시의 위정자들이 건설할 수 있었을까?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의 조선을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 현대적인 법률과 행정기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미개국이라며 일본에 통치권을 허용해 주었다. 일본인들 역시 자기들이 아니었으면 한국의 개화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국민의 고혈을 짰다고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이 자본을 투자했다. 조선왕조의 능력으로는 총독부건물, 화신, 신신, 반도 등 당시 최대규모의 건물들도 지을 수 없었고, 더구나 항만, 철로, 발전소, 도로 등을 건설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전 후 일본은 그들이 이룩해 놓았던 모든 자산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 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36년간 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나 배상금은 줄 수 없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돈을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윽박질렀다.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우물 안에서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 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 이광요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자존심도 모르는 거지근성을 가진 사람들, 영혼에 때가 묻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은 세계 도처에서 멸시를 받고 있으며, 유독 대한민국의 시계만 거꾸로 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 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 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지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함량미달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제조업을 생각해 보자. 눈에 보이는 비용은 불과 몇 개에 불과하다. 재료비, 인건비, 보증수리비, 검사비, 하자수리비, 테스트비, 재작업량, 반품 및 폐품처리비들이 바로 눈에 보이는 비용들이다. 그러나 장부에 잡히는 이런 비용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 더욱 크다. 단지 무식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불만을 품고 말없이 발길을 돌리는 고객으로부터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무식한 사람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설계변경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설계시간이 많이 걸려서 시기를 잃는 경우의 비용이 그런 이들의 눈에 보이겠는가? 기계고장으로 발생되는 비용, 근로자가 자존심을 잃음으로써 발생되는 비용이 장부에 기록돼 있는가? 복잡한 행정으로 인해 야기되는 비용, 애매한 목표와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행정의 복잡성과 무능 그리고 행정 지연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직장 내의 불쾌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비용, 하청업체를 과도하게 경쟁시킴으로써 발생되는 비용, 비생산적인 회의로부터 발생되는 기회비용 등이 회계장부에 잡히는 비용인가?
무능한 경영인들은 눈에 보이는 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유능한 경영자의 눈에는 수면하에서 보이지 않고 유발되는 비용이 더 크게 보인다. 신중을 기한다고 행정을 미루고 있는 동안 경쟁업체는 새로운 제품을 가지고 시장을 누빈다. 이런 비용은 회계 장부에 없고 그래서 비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일협정으로부터 들어온 이익 역시 이러한 식으로 무능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많이 받아내자고 떼를 쓰고 있는 동안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으며,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기회만 놓치고 시간만 허송한다. 만일 더 기다렸다가 그 배상금을 김대중이 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기다렸다가 그 후의 다른 대통령들이 받았다면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자기들도 뜯어가고 집행과정에서 온갖 세도가와 사기꾼들이 달려들어 줄줄이 새어나갔을 것이다.
고쳐야 할 한국인의 정신
덴마크! 인구는 겨우 5백만, 국토는 한국의 5분의 1, 땅은 모래밭과 황무지, 그러나 지금은 국민소득 3만3천 달러의 선진국이다. 1813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곤궁할 대로 곤궁해진 터에 또 다시 영국과의 7년 전쟁을 치르면서 넓고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겼고 남은 것은 노약자와 부녀자뿐이었다. 절망이었다. 일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에 나타난 '그룬트비란'이 정신적 혁명을 일으켰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국민 정신이 바뀌자 국가가 바뀌었다.
한국인 졸부가 일본 최고의 호텔에 머물면서 최고로 비싼 그림 한 점을 배달시켰다. 배달원은 자기가 잘못을 저질렀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포장지에 약간의 자국을 가리켰다. 싸고 또 싼 것이라 그림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포장도 상품으로 취급한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금전적 보상은 얼마든지 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한국인에게 순간적인 욕심이 발동했다. 그림값에 버금가는 많은 돈을 요구했다. 배달원은 그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나갔다.
영악해 보이는 한국인, 그 영악해 보이는 것만큼 한국 사람들이 잘 사는가? 어수룩해 보이는 일본인, 그 어수룩한 것만큼 일본인들이 못사는가? 일본인은 아픈 것만큼 자기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인은 엄청난 가치를 창출했을 것이다. 밖에서 많이 얻으면 얻은 것만큼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 안에서 얻은 것이 밖에서 얻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인 역사학자를 친구로 한 적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미국 증권시장 부회장으로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했다. 부친이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려 했다. 그는 거절했다. 아들을 낳은 기념으로 은그릇을 나눠주려 했다. 또 거절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걸 받으면 자식의 정신이 병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가 아버지로부터 받으면 그 후 제가 아무리 더 많은 것을 보태도 그건 제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스스로 이루어 보겠습니다."
전후에 일본인들은 미국을 무작정 증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거지처럼 공장 문 밖을 기웃거렸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미국인들은 그런 일본인들을 멸시했다. "일본인들은 죽었다 깨나도 미국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문을 활짝 열고 다 보여줘라."
1962년 당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수많은 군중을 향해 미국의 우월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은 기술 측면에서 영원히 미국과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매우 훌륭한 손수건과 훌륭한 파자마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을 미국에 수출하려 하지 않습니까?" 미국 공장을 기웃거리는 꼴사나운 정경을 멸시하는 연설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54%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의 모든 생산기지가 미국에 있었고, 세계의 신제품은 모두가 'MADE IN U.S.A.'였다. 미국인들의 우월감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제품을 쓰레기처럼 경시했다. 이를 NIH 증후군(Not Invented Here Syndrom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모욕을 무릅쓰고 일본인들은 미국으로부터 선생님을 불러들이고 미국을 견학하면서 미국을 모방하려 애썼다. "미국을 모방하자." 영어로는 "Copy the West"가 당시 일본인들의 목표였다. 일단 모방한 다음에 그들의 목표는 "미국을 따라잡자". 영어로는 "Catch up with the West"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거꾸로 미국이 일본을 배우려고 팔을 걷었다.
그 결과 1982년 즉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조롱 섞인 연설 이후 20년 만에 승용차에 대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일본 승용차가 나란히 1, 2, 3 위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 차는 겨우 7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일본을 정말로 증오하는 사람은 일본을 배워 일본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본의 배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제발, 이제는 더 이상 치사해지지도 말고, 더 이상 비참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당시 박정희의 선택
더러는 박정희가 청구권 자금을 유용했거나 편취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만 다른 대통령에게 맡긴 세금은 상당 부분 증발됐어도, 박 대통령에 맡긴 청구자금은 포항제철공장, 소양강 댐, 고속도로 등에 다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투자가 오늘날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5천년 역사를 통해 가장 못 나고 가장 가난했던 한국을 세계 12위 경제 국가로 일으켜 세웠다. “조센진이 뭐 하나 제대로 하겠어?” 자학과 무능에 빠진 한국인에게 우리도 하면 세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정신적 지도자였다.
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한 문제는 무엇인가? 청구권 자금을 1백3만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포항제철에 쏟아 부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지금도 고민을 한다. “현재의 제한된 국방비를 가지고 '현재의 무기'를 사야 하느냐 또는 '미래의 무기를 만들기 위한 생산시설'을 사야 하느냐(Weapons now or weapons future).” 청구권 자금 사용에 관한 의사결정 문제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1백3만은 일본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당시 전국을 조사했지만 모든 읍면동에서 나오는 자료는 허무맹랑한 자료이어서 신뢰성이 없었다. 불과 20년 전인 광주사태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2백 명 수준, 가까운 역사, 매우 적은 숫자에 대한 증거 자료도 매우 부정확했다. 지금부터 불과 30년 전, 베트남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개인이 월남전에 참전했는지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에 없다. 개인이 보관했던 사진과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1백년 전에 누가 피해를 보았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모든 증거자료가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
안중근 의사, 이준 열사, 유관순 등의 열사들은 자기의 몸을 국가에 바쳤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그래도 박정희 덕분에 이렇게 목숨 바친 열사들보다는 인생을 더 오래 살아오지 않았는가? 피해자들에 마음으로부터의 동정과 사랑을 표하고 싶다면 지금 잘 살고 있는 대통령과 부자들부터 돈을 걷어 위로금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생각할 게 또 있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일의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들은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남한에서 살아온 일제 피해자들은 박정희의 덕을 보았지만, 북에 있는 동포들은 박정희의 혜택은 커녕 김정일 학정 하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고 짐승 같은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 피해자들에 동정심을 표하는 사람들이여, 필자는 당신들의 그 높은 체하는 도덕심을 믿지 않는다. 남한에 사는 일제 피해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고생하는 북한 인권에 대해 당신들은 왜 말이 없는가? 아무런 죄 없이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는가? 이 나라를 지키려다 북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도덕심 높은 체하는 그대들이여, 당신들이 일제 피해자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그들보다 더 불쌍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필자는 미국에서 분석(Analysis) 분야에 평균 이상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국가경영에 남다른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한다. 나이는 60이 넘으며 지금도 촌음을 아껴 쓰며 자기 발전에 힘쓰는 사람이다. 이런 지식, 지혜, 연륜을 가지고 있는 필자가 1965년 당시의 박정희의 자리에 섰었다면 필자 역시 박정희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간단히 잘라서 말해 보라. 당신들이라면 그 청구자금을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포항제철 등에 투자하는 것 두 가지 대안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했겠는가를! 과거사가 폭로될수록 사람들은 박정희의 업적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80%의 현 지지자들은 90% 이상으로 상승할 것이다.
* 지만원 박사는 경영과학 박사로. 육사 22기, 월남참전 대령 예편. U.S.NPS 부교수.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 군사평론가. 서울시 시정개혁위원.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자문위원을 지냈다. ------------------------------------------------------------------------- 주간현대 기사
2009.11.8. 지만원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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