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독일을 찾은 두 얼굴!] 우리의 경제가 이만큼이나 성장되고 올림픽 개최국으로써 세계에 그 위상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해도 고 박정희 대통령의 남다른 애국심과 지도력에 의함이다. 돌이켜보면 경제성장과 인권이 고르게 발전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잘 살고 보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인권에 그 만큼 충실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국의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의 모든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인권) 문제로 부관참시하려는 자들이 있으며 특히 이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시절 간첩 혐의를 받았던 친북 좌파(또는 주사파)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것이 심히 염려스럽다. 이들의 국가 보안법 철폐 주장과 숭북주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이들이 이구 동성으로 말하는 것들이 6.15 공동선언의 성실한 이행이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미군의 한반도 완전 철수라는 그림자와 남북 평화선언이란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1964년12월10일 독일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과 2005년 4월 독일을 찾은 노무현의 모습이 너무나도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어서 국민들과 재독 교민들의 가슴을 아프게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조국의 경제 부흥을 위해 모든것을 팽게치고 차관을 얻으려는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모습이었으나 노무현의 독일 방문은 초호화판 그 자체였으며 그 호화의 도가 지나쳐 독일 사람들은 물론 교민들로부터도 이해할 수 없는 자로 비웃음의 잔치판을 열어 주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에 간 비밀 이야기!] 1963년 11월! 당시 조국의 형편은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는 사람이 1년에 한 두명이 있을까 말까한 것이 현실이었다. 가난하디 가난한 조국에서 수십대 1의 경쟁력을 뚫고 선발된 광부와 간호사들 6,000 여명이 서독에 도착한 날은 1963년11월이다. 이들의 서로운 타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국 근대화란 기치를 내 걸고 경제개발 5개년이란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힌 것은 외자의 부족이었다.
미국에 사정도 해 보았지만 구테타 세력이란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달려 간 곳이 독일이다. 독일은 당시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고 라인강의 기적이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사절단을 파견하여 차관을 제공하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고 독일은 아시아 수출 시장을 개척하려는 의도가 용케도 맞아 떨어져서 독일은 한국에 1억 5000마르크의 상업 차관 제공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차관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누가 지급 보증을 서느냐였다. 한국에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는 전 세계 아무곳에도 없었다. 차관을 제공하겠다는 결정은 보았지만 지급보증 문제로 차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까지 몰린 박정희 대통령이 궁여지책으로 마지막 방안을 독일에 내 놓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독일에 광부 5000명과 간호사 2000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즉 우리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3년간의 급여를 독일의 유수 은행인 코메르츠 뱅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 형식으로 지급보증 문제의 해결을 보았다.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픔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독일에 첫 발을 디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타국 생활을 한지 일년여가 지난 1964년12월10일 오전에 독일 루르 지방 함보론이란 탄광의 한 공회당에서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범벅인 한국인 광부 500명과 한복 차림의 간호사들이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내자 실내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이들의 울먹임이 하도 심하여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며 이어지는 애국가의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급 보증을 서 줄 나라가 없어 사랑하는 국민을 탄광과 간호사로 독일에 보낸 박정희 대통령은 잠시 진정을 취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박정희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의 연설은 끝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공회당은 눈물 바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울었고 육영수 여사도 울었다.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독일의 뤼프케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울음을 훔쳐내고 있었다. 탄광을 떠나 뤼프게 대통령과 승용차에 동승한 박정희 대톨령은 "내가 죄인이다..."라고 몇번이고 되뇌이면서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독일의 뤼프케 대통령은 "울지 마십시요!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룹시다"라며 박정희 대통령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아우토반에서 두번이나 멈춘 대통령!] 당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은 아우토반(Autobahn)이었다. 독일 방문 첫날 본에서 쾰른으로 이동하는 20키로 구간의 아우토반을 지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두번이나 자동차를 멈추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실무자들에게 고속도로 건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고 건설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에 대하여 세심하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며 통역을 하던 백영훈 박사는 차 안에서 조용히 메모지에 한국(남한)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경부고속 도로의 구상은 이때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머리 속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훌륭한 지도자와 머저리의 차이!] 박정희 대통령은 귀국 후 2년동안 사람들을 독일에 파견해서 고속도로의 관련 자료들을 모아 들였다고 한다. 독일 방문 후 4년의 세월이 흐른 1968년 12월21일 대한민국 고속도로 제 1호인 경인 고속도로가 완성되었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은 1970년 7월 7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의 아우토반에서 차를 멈추게하고 차 속에서 한국의 지형을 메모장에 그리던 때로부터 6년만에 민족의 대동맥인 명실 상부한 고속도로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얼마전 노무현이 독일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보기에도 화려하고 값비싸 보이는 턱시도에 권양숙은 조선시대의 왕비복을 걸치고 방문하였다. 예전에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가 궁중에서 입는 왕비복을 입고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가 교포들로부터 계산 세례를 맞은 기억이 새롭다. 독일에 있는 교포들은 미국의 교포들과는 또 다르다. 바로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아니 조국의 지급보증을 위해 자신들의 몸과 노동을 담보로 독일에 가신 분들이 사실 상 이민 1세대이다.
당연히 교포 1세대는 광부와 간호사들이 대부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눈물 바다를 이루었던 일들을 독일의 교민들은 바로 엊그제의 일처럼 기억하고들 살아간다. 그들은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아직도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검소하게 근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절대로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대한민국의 아들 딸로써 자랑스럽게 살아 간다. 이러한 곳에 노무현은 초 호화판 방문으로 많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 또한 조국 근대화를 위해 지급 보증용으로 비행기를 탔던 많은 교포들은 분노를 느껴야 했다.
[Er bringt 145 Mann gefolge, Leibkoch und sein eigenes Wasser mit-vom Hotel bekommt er ein extra Schminkzimmer.] 독일 신문들이 보도한 노무현의 독일 방문 기사중에 가장 판매 부수가 많다는 BILD Frankfurt 의 기사이다. 독일 신문들은 노무현이 누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가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무현이 얼마나 초화화판으로 독일에서 꼴깝을 하며 보냈는지 독일 신문들은 연일 노무현의 호화판 체류를 비웃는 기사들을 주로 보도하고 있었다. 노무현이 대동한 사람들은 무려 145명이고 자신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조리사는 물론이요 요리를 하는 물까지 한국에서 가져가 호들갑을 떨었다고 한다.
특히 이번 노무현의 방문을 위해 그것도 단 하룻밤의 숙박을 위해 노무현은 화장을 하는 방을 따로 요구하였으며 호텔측에서는 하룻밤을 위한 화장하는 방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여 수리를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들이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들의 숫자는 무려 65명에 이르렀고 80여개에 이르는 가방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들어있었으며 inter continental 호텔에서는 노무현만이 먹는 국을 끓일 수 있는 노무현의 전용 부엌을 준비했다고도 한다.
[하늘의 분노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석탄을 들여마시며 또는 밤새도록 시체를 닦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재독일 교포들의 원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무현이 초 호화판 여정을 보내는 돈도 알고보면 자신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급여가 3년간 독일의 은행에 강제 예탁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그런 독일을 방문하면서 그곳 교포들에게 과연 노무현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귀국했어야 옳은 일인가? 그건 바로 머저리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라며 교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아우토반을 달리며 두번씩이나 멈추게하고 메모지에 한국의 지형도를 그려 놓고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꿈을 안고 귀국했다면 노무현은 초호화판 여행에 방탄 BMW를 한대도 아닌 5대나 계약을 하고 왔다는 얘기인데...
동족을 향해 지은 죄가 하도 많아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정일이 한 곳에 머무르며 잠을 잘 수가 없어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잔다는데 노무현도 자신이 지은 죄를 아는지 그래서 초 강력 방탄차가 필요하게 되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초 호화판 생활에 걸맞게 내가 한국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돈을 물쓰듯 BMW를 5대나 계약하는 객기를 부린 것인지... 아무튼 정상적인 사람은 분명 아니다. 이런 사람을 믿고 3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우리를 너무도 불쌍타하여 하늘이 도와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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