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3월25일, 20세 되던 해에 박정희는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월1일에 문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담임교사가 됐다. 월급 45원, 대구 일대에서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이 자자했다. 그는 체조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체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월급 45원 중 하숙비 8원을 내고 가난한 집 아이 3명에 대한 월사금 3원, 본인 용돈 10원을 빼고 그는 나머지 월급을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도 가끔 늙고 병든 아버지가 학교를 찾아왔다. 처를 돌보지 않는 자식을 타이르기 위해 찾은 것이다. 아버지가 그럴수록 박정희는 아내가 더욱 싫어 방학 때에도 집을 찾지 않았다. 교사가 된지 만 1년 만에 그런 아버지도 세상을 떴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더욱 노골화했다. 그럴수록 박정희에게는 반골기질이 발동했다. “학생 여러분, 전 세계를 다 얻는다 해도 민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다.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범학교에서 한국인 교사들로부터 배운 정신을 학생들에 가르쳤다.
박정희는 늘 허름한 옷을 입고 교무실 출입문 가까지에 앉아 있어서 가끔 사환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의 하숙방에는 나폴레옹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었다. 소풍을 갔을 때, 한 학생이 물에 빠져 고함을 치고 있었다. 다른 교사들은 어 어 소리만 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박정희가 뛰어들어 아이를 건져내 인공호흡을 시켰다.
박정희 옆에서 일본 교사 한 사람이 여학생들에게 조선여성에 대해 흉을 보았다. 예의가 없다, 젖가슴을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닌다는 등이었다. 이 때 박정희는 따로 학생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저 말 잘 새겨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받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에는 조선말을 해라”
말은 간단명료했고, 청소와 정돈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학생들에게 위인전 이야기를 해주면서 큰 사람이 되라 꿈을 키워주었다. 나팔 불기를 좋아해 합창반과 악대를 조직하여 행사를 열기도 했다. 소풍 시에는 도시락이 없는 학생과 자기 도시락을 나누어 먹기도 하고, 발목을 삐어 걸음을 걷지 못하는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온 적도 있었다.
일본 교사들과 싸움하는 일이 잦았다. 말다툼 끝에 ‘조선놈’이라는 소리를 듣자 박정희는 의자를 던진 일도 있었다.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물고 교무실로 들어와 박정희에게 “어이, 교장 게신가”하고 물었다. 박정희는 그 일본인을 한번 희끗 쳐다본 후 아무 말 없이 일을 했다. 일본인이 재차 똑같은 말로 묻자 박정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런 언동을 할 수 있는가? 일등국민을 자처하고 싶거든 교양이 있어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 온 것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 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 없다. 어서 나가 봐”
박정희는 한 학생을 시켜 일본 교사가 오는지 망을 보게 한 후 조선어, 역사, 시조, 위인들에 대해 가르쳤다. 그의 영향을 받아 한 학생은 사진 속에 있는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칠해 혼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막걸리를 좋아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다가 친구들, 하숙집 주인이랑 마시면 평소에 말이 없던 그는 ‘왜놈들’이라는 말을 자주하면서 분노를 표했다. 이순신을 좋아했고, 황성옛터가 18번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는 어김 없이 학교운동장에 나가 나팔을 불었다.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기상나팔이었다.
“왜놈이면 다여! 그 새끼 때려죽이려다 놔두었다”.
‘아리마’ 교장을 패주고 들어와 식식거리며 한 말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교장에 대한 반항으로 장발을 했다. 당시 장발은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요 반발로 인식됐다. 이를 장학사가 와서 지적했고, 교장은 교사들을 초대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두발문제를 거론하며 장학사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모욕감에 박정희는 술잔을 던져 버렸다. 아리마 교장의 입에서 “조선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박정희의 주먹이 교장의 면상에 꽂혔다.
이어서 사표를 내고 3년간의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마감한 후, 군인의 길을 찾아 정처 없이 북만주로 떠났다
2005.9.8 지만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