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300여 년간 이어온 청나라에 신해혁명이라는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다. 전제정치가 끝나고 공화정치가 시작됐다. 이 혼란기를 틈타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배후 조종하여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떼어내 민주국을 세웠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국 황제로 삼아 괴뢰정부를 세운 것이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불릴 만큼 사람들이 몰렸다. 야망에 불타는 군인, 관료, 엘리트, 일본군, 만주군, 장개석군, 팔로군, 조선독립군, 아편장사, 마적, 첩자 등 온갖 종류의 군상들이 몰려와 있었다.
보통학교에서 일본교장을 때려주고 사표를 내던진 박정희 역시 갈 곳이라고는 동양의 신천지 만주 밖에 없었다. 상주의 학교를 떠난 박정희는 잠시 고향에 들려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만주로 가서 그를 좋아했던 ‘아리가와' 대좌를 찾았다.
“너 웬 일이냐?”
“만주군관학교에 다니고 싶어 왔습니다”
“그래, 너는 군인이 돼야 해”
아리가와 대좌는 입학에 필요한 추천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었고, 이로써 박정희는 1940년 봄, 만주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2기생은 총 470명, 일본인 240명, 만주인(한족, 몽고족) 228명, 조선인 12명, 박정희의 입학성적은 470명 중 15등이었다.
조선인 중에는 이한림, 이재기, 이섭준, 김재풍, 김묵 등이며 이들 신입생들은 4년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입교한 사람들인 반면, 박정희는 3년제 사범학교에다 교직 생활 3년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이나 성숙도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는 2년제 예과에 해당하며, 윤리, 법학, 철학, 역사 그리고 중국어를 가르쳤다. 오전에는 학과시간, 오후에는 군사훈련 시간이었다. 취침시간 직전에는 오성(五省)을 외웠다.
1. 지성에 위배된 점은 없는가? 2. 언행에 부끄러운 점은 없는가? 3. 기력(氣力)이 부족한 점은 없었는가? 4. 노력에 아쉬운 점은 없었는가? 5. 부정(不精)에 손을 댄 점은 없었는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과 무자비한 구타였다. 1기생은 2기생에게 기강을 세운다며 구타했고, 조선인 1기생은 조선인 2기생에게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뒤지지 말라고 구타했다. 이런 1기생으로는 박임항, 최창륜, 이기건, 방원철 등이었다.
박정희에 대해 방원철은 이렇게 히고했다. “내가 박정희를 주먹으로 때린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휘청거리는데 박정희는 딱 버티고 서서 맞았다. 돌같이 단단했다. 맞아서 몸이 밀리면 금방 제 자리로 돌아와 다음 주먹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지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의 동기생 이재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너 댓살 아래인 1기생들로부터 구타 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국인 중에 홍사익이라는 중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육사 26기를 졸업하였고, 2차 대전 후 전범자로 처형되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를 찾아와 조선인들만 모아놓고 훈화를 한 적이 있었다.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과묵하기만 했던 박정희가 감동적인 열변으로 답사를 하여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1기생 중에 이기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 때 국군으로 전향하여 사단장을 마치고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만주에서 그를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왜놈 보기 싫어 왔다고 말하더라. 나는 그 때 왜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북에서는 일본놈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로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일요일이면 내 관사로 찾아와 놀다가 갔다. 가난했던 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무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담배와 술을 매우 좋아 해서 나는 배급표로 정종으로 바꾸어 대작하곤 했다. 그는 일본놈들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우리는 곧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박기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만군 준위였고, 와세다 대학,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정일권 상위는 만군 헌병사령부에 근무하였는데 자주 박정희 생도를 불러내 저녁을 사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박정희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의 노래를 불렀다. 모두는 어안이 벙벙해 했다.”
1940년부터 창씨개명작업이 시작됐다. 성을 일본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배급도 주지 않고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41년 창씨 개명되어 ‘오카모도 미누루’ 혹은 ‘다가키 마사오’로 불리게 됐다. 그는 검도, 유도, 승마, 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출중했고, 1942년 3월, 420명 중 1등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아울러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재학생 송사에 대한 답사를 했다. 그 모습이 뉴스영화로 쵤영되어 많은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이 모습을 보고 고무되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 간 생도 중에는 강문봉이 있다. 그 역시 만주군관학교-일본군육사를 거쳐 군사령관을 마치고 3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동기생 김종길은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 생애 중 가장 흥겨웠던 때가 일본육사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학 때가 되면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귀교시간을 어겨 외출금지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의 작은 누나 박재희가 동경에 살면서 박정희의 뒷바라지를 잘 해 주었다. 동기생 이섭준의 누이동생이 일본에서 자취를 하며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식량시정이 어려웠다. 박정희는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싸다가 여동생에게 주기도 했다,”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성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유시간이면 운동장을 혼자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1944년,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위치한 관동군 635부대로 배치됐다가 이어서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됐다. 만주에 산재한 공비 즉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2005.9.1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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