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은 일본족, 한족, 조선족, 만주족, 몽고족의 다섯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박정희는 만주 육사에서 2학년을 마친 후, 일본 육사 3학년으로 입학, 3등으로 졸업했다. 이는 조선인이 일본인 수재만큼 우수하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만주국 제8단에서 모택동의 팔로군과 싸울 때에 박정희에게는 중국인 고인경(高印慶)이라는 친구가 생겼다. 고인경은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회술했다.
“박정희 소위는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한 것 같으나 내심은 퍽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평천진(平泉鎭)이라는 곳에 있을 때 박정희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일본과 공비들은 모두 우리의 적입니다.이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우리들의 국가와 민족의 자유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박정희 또래의 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군에 있으면서 조선인 장교 및 하사관을 상대로 개별적인 민족주의 의식화 작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있었다. 박승환(朴承煥)! 그는 1918년 경기도 파주군 월룡면에서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제2고보(경복고)를 나와 1937년 봉천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나이는 박정희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군관학교는 박정희의 3년 선배였다. 학창시절에는 스케이트 및 수영선수였으며, 훤칠한 키에 힘이 세고 미남형에다 정열적이었다. 군관학교 시절에 그는 교관이었던 간노 히로시와 절친하게 지냈다. 졸업 후에는 봉천 비행대에 근무했고, 그 때에 당시 관동군 군사학교 부교장이던 홍사익의 중매로 김순자(金順子)와 결혼하였다.
본래 김순자는 친일파의 딸이었으나 박승환과 결혼하면서 열렬한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 당시 박승환과 알고지내던 사람들 중에는 박정희, 문용채, 최남근, 최창륜, 양국진, 이기건, 박임항, 김백일, 이상열, 박준호, 박동균 등 10여명이 있었다. 문용채는 만군대위-군사영어학교-부군단장을 거쳐 육군준장으로 예편했고, 양국진은 만군대위-군단장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 박임항은 만군대위-군사령관을 거쳐 중장으로 예편, 박동균은 만군대위-병무국장을 거쳐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김규식 박사의 비서실장을 했던 송남헌은 그의 저서 ‘해방 30년사’(1990. 까치사, 26쪽)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박승환은 당시 항일지도자였던 여운형 및 당시 일본군에서 조선인으로는 최고의 계급이었던 홍사익 중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만주국 조선인 출신 장교 60-70명을 규합하여 독립군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그는 일본의 패전기색이 역력했던 1944년 일본군의 기밀작전 지도를 탈취하여 광동군의 주력이 남방으로 이동하는 허점을 이용하여 만주에 산재한 독립군 및 조선인 출신 만주 군인들을 통합하여 1개 사단 병력을 만들어 1945년8월29일 국치일을 기하여 국내진공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일본군 항복이 예상보다 빨라 박승환의 야심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비밀 거사에 참여했던 조선인 출신 군인 중에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는 북경에 있던 광복군 제3지대 김학규(金學奎) 부대에 편입하여 1946년에 귀국하였고, 박정희 또래의 장교들 중 많은 수가 8.15 즉시 귀국하여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다.”
“여운형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으며, 중국 금릉(金陵)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5년 일본이 망할 것에 대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스스로 위원장이 되고, 8.15해방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 정치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 인물이다. 그는 1945년 4월말,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박승환을 건국동맹 대표로 임명하고, 그에게 메시지를 지참시켜 연안에 파견한 적 있었고, 이어서 정세보고서 및 통계 자료 등 기밀자료를 김순자에게 맡겨 북경의 이영선을 경유 연안으로 가게 하던 도중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박정희와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문용채는 이렇게 술회했다.
“1945년4월, 박승환, 박준호, 이상열, 최창륜, 그니고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그 최창륜이 군관학교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 나는 만군 대위, 그는 소위였다. 박정희는 반벽산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 곳에서 가까운 금주 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었다. 그 때에 박정희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만군 제8단에 있는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 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대해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 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드러날 수 없었다. ‘조선건국동맹’에 이름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판단하는 모양인데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운동 단체였다.”
“1945년2월9일, 만주군 제8단을 위문하기 위해 ‘신태양 악극단’이 찾아왔다. 단장은 김이태(金履泰), 단원에는 손목인, 김준영. 윤난성 등 10여명의 가수와 연기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악극단의 잡부를 가장하여 따라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이용기(李龍基)였다. 그는 광복군 화북지구의 특파원으로 광복군 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지령을 받고 왔다. 위문공연이 끝난 후 박정희와 이용기는 술자리를 함께 하며 긴밀한 말을 주고받았다. 이 때 이용기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커다란 도장이 찍힌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보였다. 그 후 박정희에게는 ‘조선건국동맹’이 추진하는 작전계획에 협조하라‘는 밀명이 떨어졌다.”
박승환의 조카 박명근(朴命根)은 이렇게 술회한다.
“나의 삼촌 박승환이 요절한 뒤 나는 삼촌의 동지들을 자주 찾았다. 내가 심계원(감사원)에 근무할 때 1군 참모장이었던 박정희 장군을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으며 삼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삼촌의 딸 정근이가 해운대로 갔다가 익사했을 때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 장군이 시체 수습 등 여러 가지 편리를 봐 주셨다. 내가 청와대에 근무할 때 그리고 지역구 의원 후보로 나섰을 때, 반대편에서 삼촌 박승환의 사상을 문제삼았지만 이 때마다 박장군은 이를 막아 주셨다. 그 분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였으며 한 때 박장군 자신도 똑같은 오해를 받아 군에서 홍역을 치룬 적이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만군 소위 박정희가 속해있던 만주군 제8단의 본부는 열하성의 반벽산(半壁山에 있었다. 북경의 동북쪽, 만리장선성의 북쪽 변경에 위치한 곳이다. 제8단의 병력은 약 3천 명, 공산 게릴라들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민심을 얻는 것이 전투보다 더 중요했다. 제8단의 단장은 중국인 당제영(唐際榮) 상교(대령)이었고, 박정희는 단장 당제영 대령의 부관이었다. 제8단의 사병은 전원 중국인, 장교 역시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일본인은 20여명, 조선인은 단 4명뿐이었다. 이 4명의 조선인 장교는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박정희였다. 신현준은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만군 대위-초대해병사령관을 역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고, 이주일은 만주 신경군관학교-만군대위-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했고, 방원철은 만주신경군관학교-만군 중위로 군생활을 마감했다.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 사이에 치열한 사상전이 전개됐지만 이들은 일본이라는 외부세력에 대해서만큼은 연합하여 공동 대처하자는 소위 국공합작을 했다. 1945년8월14일, 방원철 중위가 부대를 이끌고 구산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단장의 부관인 박정희 소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수고가 많습니다. 지금부터 기밀 유지를 위해 조선말을 쓰겠습니다. 소련군이 일본을 침공했습니다. 우리 제8단은 명령에 따라 외몽고의 다륜(多倫)으로 진격합니다. 훈련을 중지하시고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여 내일 새벽까지 본부로 돌아오십시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전화를 받은 방원철은 8월15일 새벽 반벽산으로 가기 위해 출발을 했지만 여러 계곡과 절벽을 지나는 동안 폭우가 쏟아져 고생을 했다, 바로 그날이 해방되는 날이었지만 거대한 중국 대륙의 늪 속에 깊이 빠져버린 제8단은 한동안 종전 사실도 모른 채 이처럼 산악을 헤매고 있었다. 종전이 되자 구심점을 잃은 만주 땅에는 일본군, 소련군, 만주군, 장개석군, 모택동군 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만주군 제8단에 속했던 조선인 4명은 즉시 무장을 해제 당한 채 손님 대접을 받으며 며칠 동안 부대에 기거했다.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중위로 승진한지 불과 한 달만에 이런 역사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무장해제 당한 조선인 방랑자 4명, 이들의 과제는 무사히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철도가 마비되고 대중교통수단이 전혀 없고, 질서유지를 위한 공권력이 전혀 없는 무법지대가 된 광활한 만주 벌판, 나 이외에는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는 잡다한 무장 세력들이 은거-활동하는 만주 벌판에서 이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총질을 당할지 모르는 그런 신세가 됐다.
방원철은 아내가 기다리는 봉천으로 갔고, 박정희, 이주일, 신현준은 북경으로 방향을 잡고 8월29일에야 북경에 도착,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가장 먼저 조선인이 운영하는 음식점 덕경루(德慶樓)를 찾았다.
이곳에 잠시 머문 후 이내 북경 동북쪽에 있는 제지공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임시정부가 보낸 최용덕 장군이 숙영지로 마련한 곳이었다. 최용덕은 당시 중국 공군소장으로 장개석의 전용기를 조종했으며, 중국 육군대학 졸업-중안군 대좌-광복군 참장-공군참모총장-공군중장의 경력을 거친 사람이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장개석군, 팔로군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젊은이, 일본군 및 만주군에 소속했던 젊은이들을 모두 긁어모으려는 노력을 했다. 최용덕이 모은 청년 수는 400여 명, 이들은 김학규가 지휘하는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로 명명됐고, 대다장은 신현준이 맡았다. 신현준이 이끄는 제1대대장 밑에서 이주일, 박정희, 윤영구(학병출신)가 각각 제1,2,3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소총, 기관총으로 기본 무장을 갖춘 후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매일 훈련을 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애로는 식량, 식량을 구하기 위한 백방의 노력이 이어졌고, 심지어는 광복군채를 발행하여 그 곳 동포들에게 팔기도 했다. 굶을 때도 많았다. 이 무렵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조팝 깡다리에 소금국만 먹어도 광복군 정신만은 씩씩하게 살아있다“
제1대대장이었던 신현준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의 혼란상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이 망해버리니 제8단도 장개석에 붙어야 할지 모택동에 붙어야 할지 갈팡질팡했고, 광복군 안에서도 사상문제로 부대원들 사이에 틈이 벌어져, 밤을 새워 토론을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박정희에게 ‘중대장동무’라고 불렀다가 박정희가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동무가 뭔가? 내가 자네 동무란 말인가?" 광복군 제3지대는 부대단위로 집단 귀국하기 위해 중국정부와 미군정당국을 상대로 교섭을 벌였지만 집단입국이나 광복군 이름으로 입국하는 것은 허가되지 않았다. 전승국 입장도 아니고 패잔병도 아닌 묘한 입장에서 이들은 10개월 동안 허송하다가 1946년5월6일, 미해군 수송함을 타고 천진을 떠나 5월8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박정희와 신현준은 다시 기차편으로 서울 소재 피난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박정희는 다시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갔다.
통신이 두절됐던 시대라 박정희는 생사에 대한 안부마저 전하지 못했다. 죽지 않고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는 반겼지만 형제들은 냉대했다. “그냥 선생질이나 하고 있었으면 됐을 텐데 제 고집대로 하다가 거지가 됐지 않느냐”며 면박부터 주었다. 검정 물감을 들인 군복에 낡은 군화를 신고 땡전 한 푼 없이 돌아온 거지 박정희, 그는 형들이나 누나들의 집을 들락거리며 아무 데서나 먹고 자다가 심심하면 대구로 나가 친구들과 술을 퍼마시곤 했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술만 마시겠니, 취직을 해야지”
“구미에서 무슨 취직을 해요. 아무래도 서울로 가야지”
“귀희 언니한테 돈 얻으러 갔었니?”
“에이, 돈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 마당에 보니 닭도 여러 마리 있던데 그거 한 마리 잡아먹었으면 좋겠더라”
“서울가는 여비는 자형이 해 줄터이니 서울에 좀 가봐라”
누나 박재희는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 앓고 있는 누나에게 형 상희가 무엇인가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선반에 얹어 놓으면서 “이것 좀 잘 보관해라”하며 나갔다. 다음날 박정희가 그 신문지를 풀어보니 카메라였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테니 형님한테는 나 기차 탄 뒤에 말해요”
“그거 비싼 거니?”
“갖고 가서 비싸면 팔아 쓸 거요”
서울에 온 그는 1946년9월24일, 29세의 나이로 육군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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