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에 조선의 소위가 된 박정희
해방 공간의 조선사회는 아수라장이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에는 소련군, 남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일본이라는 상전이 밀려나간 자리에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상전이 들어 찬 것이다. '미-소공도위원회'의 개최, '한반도신탁통치안'의 발표를 둘러 싼 좌우의 대결, 수백 개의 정당, 사회단체 등이 난립하여 해방공간 속의 조선은 아비규환, 연옥의 땅으로 변했다. 일본이 점령해 있었을 때에는 조용했던 조선반도가 미국과 소련이 점령하면서부터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이런 시기에 박정희는 서울로 올라와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경쟁률은 2대1, 입학생은 263명, 교육과정 3개월, 광복군, 중국군, 일본군, 만주군의 장교출신이 35명이나 됐다. 이 때 박정희의 나이 29세, 고향 선산(善山)을 떠날 때 데리고 온 김재규 역시 동기생으로 입학하게 했다. 내무생활은 일본군 내무생활 그대로였다. 맺 토요일이면 빈 병으로 마루 바닥을 문질러 윤이 나도록 했다.
흉년이었기에 강냉이밥을 먹기도 했고, 고구마로 세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내무반의 창에는 유리가 없어서 종이로 바르거나 널빤지로 대강 메워 바람을 막았다. 땔감을 쪼갤 도끼가 없어 돌로 나무를 쪼갰고, 모포에는 이가 버글거렸으며, 여름옷으로 겨울을 났다.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에 입교한지 불과 1주일만에 대구 10.1 폭동이 일어났고, 바로 이 10.1 폭동에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 박정희는 형이 살해된 사실을 한동안 모르고 3개월 과정의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조선경비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공산주의가 합법으로 인정되던 해방공간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북에서는 소련이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 수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미 토지개혁을 실시한 김일성은 남에 있는 좌익들을 충동질하여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을 정도로 격렬한 시위와 폭동을 배후조종했다.
박정희가 한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1946년 10월1일,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빨갱이들이 주동이 된 대규모 파업사태였던 것이다.
좌익들은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학생의 시체(뒷날 경찰은 학생의 시체가 아니라고 발표)를 메고 19구 경찰서 앞으로 모여들었고, 이에 남녀 중학교까지 가세했다. 이는 광주사태와 정확하게 닮은 것이었다.
학생 대표와 경찰 간부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어, 학생측의 요구조건이었던 경찰의 무장 해제 등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이에 역전에서는 노동자를 위시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여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벌어져 많은 희생자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경찰의 무장 해제 승인으로 일단 총성은 그치게 되었다.
시위대는 무장 해제로 방어력을 상실한 경관을 비롯해 관청 수뇌급 인사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자, 경찰은 다시 무장을 하고 응원대를 얻어 파업세력과 좌익 지도자 검거에 나섰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경북 진역으로 확산된 소위 10.1폭동은 해방 후에 일어난 가장 큰 소요사건이었다.
폭동이 어느 정도 진정된 10월 12일 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경찰의 피해는 사망자 38명, 행방불명자 36명, 부상자 30명, 피해 경찰서는 대구를 비롯한 도내 10곳, 전소된 경찰서는 영천서와 예천서장 관사 두 곳이었으며, 동으로 그때까지 검거된 자가 7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 38명의 경찰들은 군중에 붙잡혀 몽둥이로 맞아죽고, 불에 타 죽고, 살가족이 벗겨진 채 죽었다. 경찰들의 가족과 재산도 보복을 당했다.
이 시대에 시민들이나 학생들은 미군정이 일제 시대에 민족탄압의 앞장 질을 했던 경찰들을 경찰간부로 등용했기 때문에 경찰들을 미워했고, 경찰은 혼란스럽고 날로 폭력화돼가는 시위와 폭동을 상대로 질서를 유지하려다 보니 불가항력적으로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는 옳지 못한 일들도 있었다. 억울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기도 했고, 자기와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잡아다가 빨갱이로 매도하여 죽이는 일도 있었다. 궤를 일탈한 이런 행위들 역시 시대의 산물이요, 민도의 산물이었다.
시위대는 이런 사례들을 약점 잡아 시민들과 학생들을 선동하여 경찰에 맞서게 했고, 심지어는 죽은 시체들을 끌고 다니면서 ‘경찰이 무자비하게 죽인 학생’이라며 군중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5.18 수법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수법들이었다.
대구 폭동 사건 이후 좌익 사냥이 시작되었다. 좌익으로 쫓기기고 있던 청년들이 피난처 삼아 군에 많이 들어왔고, 장교들은 이런 청년들에 대해 사상문제로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이 허술한 틈을 타서 사상적으로 무장된 하사관들이 어린 병사들을 아예 드러내 놓고 포섭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 세포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순진한 병사들을 마음껏 조직할 수 있었다.
당시 젊은 청년들은 경찰을 일본 앞잡이였었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경찰을 미워하는 것이 곧 애국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 경찰이 미워서 ‘경찰이 적으로 여기는 공산주의자’를 애국자들이라고 생각해서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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