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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으로 몰린(?) 박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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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00 조회10,3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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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으로 몰린(?) 박상희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일어난 파업 폭동은 경상북도 전역으로 확산됐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간첩 이석(李錫)의 활동은 북한 지하조직의 활동을 대변할 만 하다. 그는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다.

1955년4월, 그는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여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 의식화 작업을 했다. 3.15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서게 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은 이에 대한 확대판이었다.

대구 폭동사건은 위와 같은 역사를 가진 간첩 이석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이런 이석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박상희는 일제시대부터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했고, 이런 일로 일본 경찰에 의해 유치장 생활을 하기도 했다. 폭동이 한창일 때 박정희의 누나 박재희는 한번 누우면 일어나기 어렵다는 그런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 때 박재희의 남편이 이불에 돌돌 말린 피 투성이의 오빠를 업고 왔다. 총탄 세 발을 맞았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녹두를 다려 먹이려 했지만 한 모금을 목에 넘기자마자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누구의 총탄을 맞았는가?

그는 구미 경찰관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경찰서장을 포함한 일부 경찰들을 창고로 피신시켰다. 한 동안이 지나자 밖이 조용해졌다. 서장이 ‘이제는 나가도 되지 않겠는가’하고 조바심을 내자 박상희가 망을 보러 문을 제치고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외부에서 진압병력으로 파견나온 경찰관들이 박상희가 경찰들을 감금해 놓은 장본인인줄로 착각하고 사격을 가했다.

사실상 박상희는 그 지역 좌익세력에서 지도자급이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좌익사상은 여윤형과 안재홍 등 당시에는 순수한 이미지로 부각됐던 인사들의 영향을 받고, 그의 반일사상과 민족주의적 관점 위에서 막연하게 형성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공산주의는 민족주의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식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상으로 접근됐으며 그래서 유행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여운형과 안재홍은 건국준비위원회 이원장과 부위원장이며, 안재홍은 국민당 당수, 미군정청민정장관을 거쳐 6.25 때 북으로 글려가 평양에서 사망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훗날 빨갱이로 판명됐지만 당시에는 사상이 위장돼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불구하고 박상희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경찰에 의해 사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고, 이로 인해 박정희는 열렬한 반공주의자 김창룡으로부터 사상을 추궁받기에 이르렀다.        

2009.9.3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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