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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간부가 된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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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4:01 조회18,1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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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간부가 된 박정희

                                                           조선군 소위 시절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1947년2월, 박정희는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제8연대에 배속됐다. 제8연대는 1946년 4월 1일에 춘천에서 창설, 춘천-원주-강릉선을 따라 배치돼 있었다. 당시 제8연대에서 38선을 지키는 실제 병력은 5개 소대였고 연대장은 원용덕 중령이었다. 이 때 미 고문관이 소대 배치에 참견하고 나서자 박정희는 “미국 놈이 왜 간섭이냐”며 욕을 했다가 원용덕 연대장이 해명하고 말리느라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원용덕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졸업- 만주군관학교-만주군 중좌(중력)-헌병사령관-육사교장-육군중장 예편의 경력자이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 소위로서 대위가 수행했던 연대 작전장교 역할을 수행했다. 훈련계획도 매우 다부지게 수립했고, 마치 조선군대의 어른이 된 것처럼 폭넓은 강평도 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중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위가 되어 1947년 9월 27일에 조선경비사관학교 제1중대장으로 임명됐다.

                  
                                                              육사가 남로당의 소굴


이 때 교장은 김백일 중령, 행정처장은 장도영 중령, 생도대장은 최창언 소령(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국방대학원 원장)이었고, 박정희 대위는 전술학을 가르쳤다. 바로 이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박정희는 좌익들의 포로가 됐다.

남로당원 황백림 중위, 강창선 대위, 김학림 대위가 박정희에 접근해 왔다. 이들 좌익들의 두목은 강창선, 그는 박정희가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매일 같이 술자리를 벌였다. 이들과 매일 같이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동조자가 되었고, 남로당 당원이 되어 버렸다. 어떤 확고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 당원이 된 것이다.

박정희는 만군 시절에 공산당인 팔로군을 무찌르는 전투를 했다. 그런 그가 왜 공산당원이 되었는가?

첫째, 1945년 8.15 해방 당시 조선민족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일제시대에 항일 운동을 하던 인사들의 대부분이 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공산주의가 민족주의인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미군정 치하에서 공산당이 합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이 날로 확대되고 있었다. 박정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둘째, 박정희는 조선이 일본에 먹힌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중의 무지와 가난이 안타깝게 생각됐지만 그가 접한 기성세대들은 사회에서나 군에서나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득권만 유지하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사회상을 부각시키는 반면 반-외세, 반0봉건을 내세우면서 불만세력, 의협심 있는 젊은이들을 규합해 가고 있었다. 박정희 역시 의협심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게 됐을 것이다.

셋째, 박정희를 결정적으로 남로당에 가입시킨 사람은 이재복 목사였다. 그는 박상희가 죽자 유족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는 대구에 주둔중이던 제6연대의 연대장 최남근 중령을 포섭하여 남노당 간부로 지명했다. 최남근은 만주군관학교의 박정희 선배였고, 제8연대에서는 박정희의 연대장이었던 사람으로 배포가 크고, 민조감정이 농후하여 박정희와 잘 통하는 사이였다.        

두 사람은 또 여운형이 만주에서 조직한 ‘건국동맹 군사분맹’ 비밀결사대에서 함께 일한 동지이기도 했다. 최남근은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고, 일본군이 약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200여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가 “이제부터 우리는 조선 독립군이다” 외치며 항일 투쟁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육군중령으로 1949년 숙군 당시 처형되었다.  


                                                             술과 인연으로 만난 남로당 간부들


이런 인연으로 이재복-최남근-박정희는 친숙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인간관계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었지 사상으로 맺어진 인연은 아니었다. 비록 박정희가 남로당 간부이긴 했지만 이는 이름이었을 뿐, 실질적으로 박정희가 공산당을 위해 활동한 것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모든 남로당 인물들이 처형당하는 마당에 박정희만 유일하게 황천문 문지방만 살짝 딛었다가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로 박정희가 술을 좋아하여 공산당에 포섭되었지만 그는 사관생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 로 인해 그는 1948년 8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2주만에 ‘대한민국정부수립일’인 8.15일을 맞게 됐다. 그해 8월17일, 제7기 사관생도들이 입교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시대에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다. 8월20일, 박정희는 이들에게 완전군장을 메게 하고 10km의 구보훈련을 시켰다. 거기에서 두 명이 일사병으로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대장 직에서 물러났으며, 이 사고 하나로 인해 그는 나머지 군 생활을 시련으로 일관하게 됐다.  


                                                       4.3사건과 여수-순천 반란사건


8.15 해방 이후 좌우익간의 대립이 치열했다. 1948년 4월3일, 좌익들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해 김달삼을 중심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그후 폭도들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장기간 유격전을 수행했다. 이 때 제주도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중이던 제14연대가 제주도로 투입될 예정에 있었다.

그러던 10월 19일, 이 14연대에서 남로당 조직책으로 있던 지창수 상사가 토벌을 저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켜 20 여명의 국군장교가 현장에서 사실됐다. 빨갱이가 이끄는 제14연대가 여수를 점령하자 순천에 있던 국군 2개 중대 역시 반란에 동조하여 순천을 적화지역으로 장악해 버렸다. 불과 1주일 만에 여수에서만 1,200여명의 군경 및 관리가 피살당하고 1,500여 명의 부상자, 9,8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토벌군 사령관에는육군 총사령관인 송호성 준장을 임명했다. 송호성은 6.25전쟁이 나자 월북하여 인민군 소장이 됐던 사람이다. 이처럼 군에는 좌익과 우익이 혼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송호성 토발사령관 밑에 육사에 있던 원용덕 대령, 김백일 대령, 백선연 중령이 줄줄이 배속돼 갔으며, 이어서 박정희 소령이 공비토벌사령부 작전참모로 불려가게 됐다.  

  

2005.10.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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