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성 공비토벌사령관은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박정희의 동기였다. 그는 20여 년에 걸쳐 중국군과 광복군 간부로 활약하다가 8.15 해방 직전에 광복군 제5지대장을 한 바 있다.
해방을 맞아 50세가 넘은 나이에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와 박정희와 함께 교육을 받았지만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터졌을 때, 송호성은 준장으로 육군총사령관 겸 반란군 토벌사령관이 되었고, 박정희는 소령 계급으로 그 휘하에서 작전참모를 했던 것이다.
지리산으로 간 공비들을 토벌하는 작전에 진행되자 이 지역 주민들은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의 통치를 받아가며 그야말로 목숨 부지하기에 전전긍긍했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이전에 미군정청 당국은 공산주의를 허용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롭게 공산화 활동을 했다. 하지만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나자 시정은 달라졌다.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 등의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지 불과 2개월 만에 군 내부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남과 북에서 협공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매우 긴장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는 전군 적으로 숙군작업을 실시했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시켰다. 숙군의 태풍이었던 것이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 토벌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전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숙군과정에서 박정희가 의심받는 것은 당연했다. 1948.11.11일 박정희는 광주에서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돌아왔고, 그 즉시 수사당국에 의해 연행돼 갔다. 당시 수사실무 담당은 김창룡, 그는 일제 때 광동군 헌병으로 중국공산당 지하조직을 수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육사3기였다.
김창룡은 공산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피고 거꾸로 솟는 사람이었으며 1953년에 준장, 1955년에 소장으로 진급하여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정을 보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각별한 심임을 받았고, 그 신임을 바탕으로 전횡을 부렸다는 평을 받았으며, 그만큼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육군대령 허태영(許泰榮)의 하수인 송용고(宋龍高) ·신초식(申初湜) 등에 의하여 1956년 암살당하였다. 그 후 허태영의 부인 황운하(黃雲夏)의 탄원으로 사건의 최고 배후자는 육군중장 강문봉(姜文奉)이었음이 밝혀졌다. 사건 직후 이승만은 김창룡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1948년11월, 박정희는 31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는 숙군 대상 1,00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식사는 소금물에 적신 주먹밥, 신문지도 없어 뒤를 손으로 훔쳐냈다고 한다. 이가 득실거리고 빈대가 많이 벽이 모두 빈대 피로 도배돼 있었다 한다.
박정희는 여러 차례 전기고문을 받으며 자술서를 썼다. 박정희에 대한 수사 책임자는 김안일 소령으로 육사2기, 박정희의 동기생이었다. 그는 후에 육군준장으로 예편하여 목사가 된 인물이다.
김안일은 박정희를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박정희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자술서 때문이었다. 내가 그의 자술서를 직접 읽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육사 재학 중, 형 박상희가 대구 폭동 때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후에 내려 가 보니 그 유족을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인 이재복이 극진히 돌보아주고 잇었다. 그가 내게 ‘공산당선언’ 등 책자를 갖다 주며 남로당에 가입하도록 꾀었고,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군내 남로당 조직의 명단을 죄다 털어놓았다. 남로당 조직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으나 활동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동료(남로당)들과 함께 술을 자주 마셨을 뿐이다. 그는 순전히 인간관계에 얽혀 남로당이 되어 있었다. 그 자술서를 읽어보니 그는 분명 이념적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를 맨 먼저 살려주자고 나에게 말한 사람은 김창룡이다. 나는 그(박정희)를 만나보았다."
"그 때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는 자포자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생명에 애착을 갖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려 달라 구걸하는 빛도 없고, 의식적으로 태연한 척 하는 빛도 없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생사가 갈리는 그런 순간에 얼이 빠져 있었을 텐데 그는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백선엽 국장에게 살려주자는 제의를 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가 살아난 데는 백선엽, 나, 김창룡의 연대보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모든 행위는 시대의 산물이다. 당시의 숙군과정 역시 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사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라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했으며, 총살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순주의자들을 색출하는 과제가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명목상이긴 하지만 남로당 간부가 살아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에 속한 것이었다.
김안일 소령은 작업복 입은 박정희를 당시 정보국장이던 백선엽 대령에게 데려갔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당시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은 그의 회고록 ‘군 과 나’에서 박정희가 측은해 보였지만 면담 도중 비굴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를 보여 자신도 모르게 “도와드리지요”라고 대답했다고 쓰고 있다.
백선엽은 정보국 김점곤 소령과 유양수 대위에게 이야기 하여 군인 신분이 박탈된 박정희를 문관으로 정보국에 근무하도록 배려했고, 1958년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업은 그를 육군소장으로 진급시켰다.
박정희의 구명운동에는 당시 군 수뇌부에 있었던 원용덕, 김백일, 김일환 등이 있었지만, 그를 살려내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는 증언들이 많다. 위기의 벼랑 끝에 서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위신과 상대방을 압도하는 의연함, 즉 타고난 무게와 크기가 그를 살려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의연함, 이는 10.26 현장에서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나는 괜찮다!”
| 2005.10.5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