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제 시대 때 일본군 소위였다는 이유로 그 사전에 등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지, 절대로 일본군 소위가 아니었다. 그 누구든 일본군은 만주국군복을 입을 수 없었다.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아래 사진이 보여주듯 박정희가 입은 군복은 만주국군복이었다. 그는 단 하루도 일본군복을 입은 일이 없었다.
목포상고 졸업앨범에 실린 아래 김대중의 사진들(붉은 색 원)이 보여주듯 일본군복을 즐겨입었던 인물은 김대중이었다. 그는 목포상고 학생회장 시절 학도병 황군 지원 권유 연설을 아주 잘했다고 한다. 당시 학생 연극은 학도병 미화 프로파간다였는데, 김대중은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을 하여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광복군 관계자들이 이구 동성으로 하는 증언은 박정희는 만주에서 조선인 병사 50 명을 탈영시켜 애국가를 가르친 뒤 광복군에 입대시켰다는 것이다. 누가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증언 사료들을 사진으로 확증할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독립운동을 사진으로 입증할 자료들이 희박하다면 김대중의 친일 행적을 입증할 사진 자료들은 여기서도 분명히 보인다. 조선인 학도 지원병 권유 연설을 하며 쌓은 연설 실력으로, 그리고 학도병 황군 복무를 미화하는 연극으로 쌓은 대중 선동 노하우로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광주사태 선동을 하였던 김대중이 히로히토 일왕에게 머리 숙이는 모습을 우리는 아래 사진에서 발견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11월 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하는 서류와 함께 혈서를 섰다는 내용이 담긴 1939년 3월31일자 ‘민주신문’ 기사의 사본을 공개했는데 도대체 이것이 말이 안된다. 첫째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박정희의 만주국 군관학교 진학은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이다. 만약 박정희가 혈서를 썼고,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대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면 만주로 가기 전에 남로당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박정희가 귀국하자마자 남로당이 VIP 특별대우를 하며 박정희를 추종하였겠는가? 박정희가 아직 만주에 있었을 때도 광복군이 달려와 그를 광복군 중대장으로 영입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등소평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국 최고 영웅으로 추대하였을 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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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동영상에서 보듯 지난 12일의 MBC 100분 토론 때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이 혈서 기사라며 복사된 문서를 내미는 순간 그들이 지난 5년간 해왔던 두가지 거짓말이 일시에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을 독립군이라 불러 국민을 혼동시키는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 박정희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었다는 주장이 그 첫번째 거짓말이요,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는 주장이 그 두번째 거짓말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외화를 써가면 조선족 류연산을 시켜 책을 위조하게 하였으나, 아래 문건에서 보듯 그 내용이 모두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유언비어를 온 천지에 퍼뜨려 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혼동시켜 왔다. 그런데, 위 동영상의 100토론에서 박한용이 지 입으로 박정희는 1938년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이렇듯 지난 12일의 100토론은 박정희가 1939년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종전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들이었음이 시청각적으로 입증해 주는 순간이었다.
두번째 거짓말은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는 주장이었다. 자, 조선신보는 북한신문이요, 조선일보는 남한신문이다. 근래에 홍익대 여대생 이도경의 입방아로 이른바 루저 대란이 일어났다. 70년 후에 어느 단체가 조선신보에 루저 대란이 실렸다는 주장을 5년간 전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했다고 하자. 그리고, 5년 후에 말을 바꾸어 조선일보 기사가 여기 있다며 자료 공갤를 했다고 하자. 그러면 식자들은 도대체 이 괴단체는 북한신문과 남한신문도 구별치 못하는 무식쟁이들의 단체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바로 이 사건이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있었다.
자, 지난 5년간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 혈서 기사가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런데, 아래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자료가 밝히듯이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된 신문이었다.
만약에 민족문제연구소가 신문 자료에 의해 박정희 혈서설을 주장했었던 것이라면 무엇하러 1939년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일보에 실렸었다고 전 매체를 통하여 지난 5년간 주장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글을 읽을 줄 몰라 만주신문을 만주일보로 읽었던 것인가? 만약 이처럼 실로 민족문제연구소가 문맹자들의 집단일진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은 저능아 재교육장이다. 역사 토론은, 더욱이 민족 문제에 대한 역사 토론은 책을 위조하는 사기꾼들은 그 버릇을 고친 후에, 그리고 신문이름조차 지난 5년간 틀리게 읽었던 문맹자들은 저능아 재교육장에서 공부 좀 더 한 후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 토론 중 중국공산당 팔로군을 항일부대라고 부르는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은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조선독립군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은 항조선족이라는 의미로 항일을 사용하였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여도 중국의 김구는 후원을 받아야 했고, 미국의 이승만은 상해임정을 후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는 조선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라잃은 민족이 갈 곳이 없었을 때 만주족이 조선족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중국인들은 온갖 방해를 하였다.
박한용이 항일부대라 부르는 무장단체는 한때 항일연군이라 불렸던 무장단체였는데, 이들이 바로 만주국 건국 이전 수십년간 철권통치로 지배하였던 무장한족이었다. 관동군과 무장한족은 평화공존의 관계였다. 관동군은 주둔비용으로 만주철도 부설을 지원하는 일 외에도 프리미엄으로 무장한족에 현대화된 군사무기를 공급했고, 무장한족은 그 군사무기를 가지고 만주족을 철권통치로 지배했었다. 그런데, 관동군과 무장한족은 평화공존의 관계가 1931년에 깨졌는데, 그 이유는 무장한족이 일본인들의 만주철도 부설권을 침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이 상권까지 침해하였으므로 관동군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으니 이를 만주사변이라 부른다. 이미 건국 준비를 완료한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신속하게 그 이듬해에 만주국을 건국하였으며, 그때부터 관동군도 무장한족과의 동맹을 끊고 만주의 원주인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무장한족이 만주를 재침략할 명분이 바로 만주에서 조선족을 몰아내자는 구호였으며, 그 목표를 항일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사실 만주의 모든 조선족이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에게 일본 국적이 있었는가? 중국 공산당은 김일성 역시 일본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에 협조하는 조선인은 혁명에 성공한 후 토지와 재산을 분배해 주겠다는 것이 그들의 약속이었다.
1912년부터 1931년까지 만주를 통치한 한족 군벌은 조선족이 무국적자라는 구실로 조선족 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는 법을 제정하였는데,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어 조선인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자 이것을 만주국 침략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박한용이 항일부대란 칭한 무장단체는 나중에 팔로군이라 불리지만, 위 동영상에서 박한용이 언급한 시기의 이 무장단체는 조선인만 골라 약탈하던 마적단, 즉 동북인민혁명군이란 명칭의 마적단이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의 정강정책이 오늘날 중국이 시도하고 하는 동북공정, 즉 한반도는 중국역사의 일부라는 논리의 출발점이었다. 그들의 정강정책 어디에도 조선독립운동이라는 말은 없다. 우선 제 1항에 동북에서 만주국의 통치를 전복한다는 것이요, 9항은 中 , 韓 , 蒙의 피압박민족은 밀접히 연합하여 공동의 적인 만주정부를 타도한다는 것일 뿐, 정강정책 그 어디에도 중국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연대하던가 한다는 내용이 단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위 동영상에서 달리라 라마의 소년 시절 중국 공산당 군대가 티베트를 침략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 박한용의 어처구니없는 논리는 중국 인민군이 티베트를 침략하였으며, 훗날 한국전쟁 때 한반도를 침략한 것이 조선독립운동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이 몽고와 만주와 티베트를 침략하는 수법이던가? 먼저 항일연군을 조직하였다. 즉, 연군이란 미명 하에 침략 대상국에 좌익세력을 키워놓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있는 나라이이 중국 땅이라는 논리로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침략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티베트인들이 독립의 희망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고 있지 아니한가? 조선인들을 동족으로 여기며 만주에서 정착할 수 있던 만주족을 배신하고, 그들이 가까스로 되찾은 주권을 중국 공산당이 강탈하도록 팔로군 용병이 된 어리석은 행동이 조선독립운동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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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존재하지도 않았었던 만주일보에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렸다고 지난 오년간 요란하게 나팔 불었던 민족문제연구소는 뭔가 사기를 쳤거나, "신문"을 "일보"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는데만 무려 5년 이상 걸린 저능아 집단들이다. 외화 낭비하며 책까지 위조하는 국제 사기단이나 이런 저능아 집단이 공개한 신문 기사는 당체 신빙성이 없다. 그들은 박정희가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편지가 일본 천황이 있는 동경과 정반대 방향인 만주국 신경으로 배달되었다는 말인가? 그간 수신자가 일본 천황이었다고 주장하더니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였다고 말을 바꾼 것인데, 당시 만주국에 그런 부서가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한 이유로서 박한용이 말하는 궁색한 논리는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에 "조조국"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1939년 3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박정희의 조국은 일본이었음을 증언하는 일본인이 있으니 바로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선생이었던 아리카와 대좌였다. 박정희가 모든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으면서도 늘 전체 성적이 바닥을 헤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아리카와 당시 중좌는 박정희가 윤리 등 황국신민 과목에는 백지 답안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맺어졌으며 오래 지속된 사제지간의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일본군복을 입고 황국신민을 주제로 연설을 하고 연극을 하던 김대중과 달리 박정희는 백지 답안을 내었다. 가난한 박정희가 계속 백지 답안 제출을 하는 것은 장래가 막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박정희에게는 오직 하나의 조국, 조선이 있었으며, 아리카와 대좌가 그 신념을 위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본래 만주국 군관학교는 반도의 조선인들이 진학할 수 없는 학교였다. 그 학교가 외국인학교도 아니었는데 혈서 쓴다고 입학이 될 수 있는가? 천만의 말이다. 박정희는 당시 관동군 대좌로 진급해 있었던 아리카와의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리카와 대좌는 남양군도로 떠나면서 미리 이런 유언 편지를 박정희에게 보냈다. "이 전쟁은 무의미하며 일본을 패배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에 추천한 관동군 대좌가 박정희의 조국은 조선이라고 말했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박정희는 황국신민이 되기를 거부하였기에 시골 문경학교 교사가 되었으며, 거기서도 황국신민이 되기를 거부하였기에 1940년 면직이 되고 아리카와 대좌의 도움으로 만주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문경의 그의 옛 제자들이 한결같이 1939년 박정희의 조국은 조선이었음을 증언한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78쪽)
이순희씨에 따르면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제자 이순희 증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 60쪽)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조갑제의 ‘박정희’ 79쪽).>>
자, 우리는 여태껏 거짓말만 해온 저능아 집단이 공개한 신문기사에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있다. 보라. 분명한 사실은 만주어와 중국어가 공용어였던 만주국의 그 어느 신문에도 그 혈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느 일본 신문에도 그 혈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 만주신문은 만철 직원들을 위한 기관지였다. 그러면 만철 직원들의 국적은 어디였는가? 민족문제연구소 논리대로라면 만철 직원들은 일본의 침략자들이었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철 직원들을 만주국 국민의 범주에 넣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이 일본 국민이었는가? 아니다. 1938년 관동주 자유항을 만주국에 반환함과 동시에 일본은 그때까지 일본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모든 만철 직원들의 일본 국적을 취소시켜 버렸다.
사실, 만약 100분 토론 중 주익종씨가 박한용에게 만주신문 창간호가 존재하며, 창간날자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라면 예리한 질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주신문은 창간된 적이 없다. 1938년 관동주 자유항이 만주국으로 반환되고 만철 직원들 일본 국적이 취소되자 그들의 국적은 만주국임을 분명히하기 위해 그 해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러면, 만주신문 발행인과 기자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6년 후인 1945년 8월 러시아군이 만주로 쳐들어왔을 때 시베리아로 끌려갈 자들이었다. 조선 주둔 일본군은 일본인부터 송환시킨 후 철군하였다. 패배한 군대의 마지막 임무는 민간인 보호였다. 그런데 관동군은 단 한 명의 민간인도 수송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남양군도에서 철수할 때 조선인 학도병들은 정규군이 아니었는데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으며, 사망자 유해를 가족에게 인도할 수 없었을 때는 일본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무엇이 그 논리였던가. 비록 조선인 학도병이라 하더라도 일본군 군번을 받았을 때는 끝까지 책임진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만주국 거주 일본인들은 자국 백성이 아니라며 전혀 거들떠 보지 않았다. 훗날 수십 만영의 일본인들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도 그들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였다. 단 한 명의 일본인이 북한으로 납치되어가도 일본 열도가 떠들썩하며 정부가 송환을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 아닌가? 70만명의 일본인이면 광주시 전체의 인구인데도 일본 정부는 철저하게 외면하였다.
관동주 자유항을 만주국에 반환한 후 일본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처럼 화란도 이중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누구든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 화란 국적이 그 날로 소멸된다. 그리고 자기를 버린 화란에 분노한 화란인들은 더 이상 조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만주신문 발행인의 조국도 일본일 수 없었다. 그 신문은 일본어로 발행되었으되 그들은 만주국에 납세의 의무를 지던 만주국 국민이었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의 장래는 미국의 발전에 달려있다. 미국 경제가 감기만 걸려도 한인 교포사회의 경제가 휘청거린다. 이처럼 만주신문 발행인의 훗날의 생사도 만주국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본래 관동주 자유항 수비대였던 관동군도 1838년 관동주 자유항이 만주국으로 반납될 무렵 그 지휘권이 관동주에서 일본 육본으로 넘어갔다. 그후의 관동군은 관동주의 일계 만주국 국민들에게 사실상 외국군이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만계이든 일계이든 만주국 국적을 가진 국민들의 문제는 만주국 문제이지 일본 정부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입학지원서 수신자가 일본 천황이었기는커녕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였는데, 만약 그런 유령부서가 있었다 해도 언론에 공개할 것이라면 왜 만주국 신문도 일본 신문도 아닌 만철 기관지에만 공개하였을리 있겠는가? 혈서 사진이 있어야 박정희의 필체인지 객관적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신문사에서 그 기사를 실었을 때 그 객관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단어 하나로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데 편집자나 인쇄공의 실수로 글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박정희가 편지를 썼으며, 그 편지에 조국이란 단어가 있더라도 그 "조국"은 조선을 의미하였음이 일본군 대좌 아리카와의 서신과 문경 제자들의 증언과 일계 만주국 국민으로서의 만주신문 편집자의 시각에서 아주 분명하다.
☞ 만주국 군관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 증거
광복군을 주적으로 삼던 마적단이 독립군이라는 KBS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북한 지령으로 제작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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