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승화의 김재규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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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07 조회19,34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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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승화의 김재규 살리기
김재규가 계엄군법회의에 송치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야에서는 김재규를 “유신에 마침표를 찍은 민주화투사”, “유신의 심장을 쏜 민주화투사” 로 미화하기 시작했다. 구명운동도 활발했다. 이에 고무된 김재규는 태도를 바꾸었다.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수부에서는 “자신이 집권하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하다가 정승화가 관할하는 군검찰로 사건이 송치되고 나자 “유신체제에 비수를 꽂기 위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11월 17일, 군검찰관이 작성한 진술조서에서 김재규는 자신이 유신체제를 종결시키기 위해 대통령을 살해했고, 당시 대통령 물망에 오른 3김은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신만이 대통령 자격이 있다는 취지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유신체제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힘을 가진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통령 살해 방법 밖에는 없었다. 이런 뜻을 실행에 옮긴 후 자살하거나 망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혼란한 정국을 수습-설거지를 하고, 내가 구상한 대로 통치하기 위해서였다. 여당에는 인물이 없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하자가 있는 사람이다. 김영삼은 역량이 미미하다. 이철승은 ‘사꾸라’라서 지지기반이 없다. 그래서 이후의 정국을 이끌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내란음모사건 소송기록 1079-1090쪽)
여기에 정승화가 가세했다. 이로부터 1주일 후인 11월 24일, 계엄선포 이후 처음으로 민과 군이 함께 참여한 ‘계엄확대회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정승화는 이런 발언을 했다.
10.26사건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니다. 박대통령 체제는 잘못 되었으므로 시정돼야 한다.
이는 박대통령에 대한 비난임과 동시에 김재규의 범행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옹호하는 실로 놀라운 발언이었다. 이에 대해 진종채 2군사령과, 백석주 육사교장, 이건영 3군사령관 등, 수많은 장군들이 심하게 반발했다.
박대통령이 서거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을 하려면 살아계셨을 때 해야지, 왜 지금 하느냐, 박대통령 체제가 잘못되었다면 여기에 있는 군 지휘관들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이로 인해 회의가 중단됐다. 1996년 3월 18일, 제2회 공판에서 전두환은 이렇게 진술했다.
김상희검사: 오전에 우리 황영시 피고인의 답변을 원용해서 묻습니다. 11. 24. 계엄확대회의가 끝난 후에 중앙일보사 부근에 있던 안가에서 황영시 피고인을 만나서 정승화 총장을 조사하는 문제에 대해서 두 사람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있습니까?
전두환: 11월 24일, 전국비상계엄확대회의를 처음 했는데 그 때 정승화 총장의 발언에 황 피고인이 아침에 진술한대로 전국에 있는 장성들이 다 흥분했어요, 언제는 박대통령이 아니면 나라가 망한다고 앞장서던 정 총장이 박대통령이 돌아가시고 피도 안 말랐는데 김재규가 군법회의, 군 검찰에 와서 진술한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을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수부에서도 그 발언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거기에 있는 장성들도 흥분해서 회의가 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황영시 피고인은 성질이 곧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분이기 때문에 그 길로 저한테 와서 “김재규 수사를 철저히 하라, 디디하게 하니까 이런 얘기가 벌써 나오지 않느냐,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게 아니냐”, 이러면서 김재규 사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고 제게 야단을 치더라고요.
1996년 5월 20일, 제8차 공판에 출두한 피고 전두환은 변호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변호인: 10.26 사건 이전에 정승화 총장은 ‘박대통령은 이 나라의 태양이요, 민족의 지도자요, 우리나라 중흥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라고 했지요?
전두환: 예. 그리고 그 때는 박대통령이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도 없고, 발전시킬 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김재규 옹호하고, 박정희를 비난하여 군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지 이틀만인 11월 26일, 정승화는 언론사 사장단과 편집국장들을 초청하여 또 이런 말을 했다.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이다. 김영삼은 무능하다. 김종필은 부패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다.
이는 소위 “3김 비토론”으로 신문을 도배케 했다. 11월 17일 김재규는 육군본부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상에 하자가 있고, 김영삼은 무능하고, 이철승은 사꾸라라는 말을 했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가 법정에서 한 말을 열흘 만에 그대로 이어받아 확대 방송했던 것이다. 위 사실들을 요약해 보자. 11월 17일, 김재규는 3김 중에서는 대통령 감이 없다며,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대통령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11월 24일, 정승화는“10.26사건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니다. 박대통령 체제는 잘못 되었으므로 시정돼야 한다”며 김재규의 범행을 정당화시키려 했다. 11월 26일, 정승화는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하고, 김영삼은 무능하고, 김종필은 부패했기에 절대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 세 가지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첫째 김재규가 잘못된 유신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고, 둘째 당시 대통령으로 물망에 오른 3김은 모두 대통령 자격이 없으므로 군을 이끌고 있는 자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내용들이다. 김재규가 정권을 잡아야 하고 자기가 그렇게 몰고 가겠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는 민감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당시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10.26-12.6)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마당에 계엄사령관이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대통령을 자기 마음대로 시키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은 통수권자와 국민 모두를 무시하는 참으로 안하무인적인 발언으로 이해됐다. 이 발언은 정가와 군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정승화가 국정에 대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야당이 반발하여 당시 예산안을 심의하던 예상결산위원회가 유회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정승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최규하 권한대행에 대한 약점을 잡으려 했다. 이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고의 수준으로 상승시키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할 만한 행동이었다. 1996년 7월 4일,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제1심 19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정승화는 이렇게 진술했다.
계엄군법회의로 송치된 기소장에는 '최규하가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부분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군검찰 부장 전창렬 중령에게 직접 최규하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정승화의 이 진술은 맞는 말이었다. 10월 26일 오후8시 40분,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물린 후 최규하 총리에게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최규하는 사실상 김재규의 범행을 숨겨준 사람이었다. 정승화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사람은 중령인 검찰관이었다. 중령인 그로서는 명령을 수행할 방법이 난감했다. 따라서 당시 모든 수사기관을 조정 통제하는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요청을 받은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갔다.
전두환: 각하, ‘정승화 총장이 군 검찰에 각하를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하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군 검찰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최규하: 좋다. 언제든지 와서 조사하라.
그리고 전창열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대통령에게 흠이 가지 않도록 조서를 작성하였다. 전두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를 전두환이 며칠 후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기 위해 최규하에게 미리 손보기를 한 것이라고 왜곡했다. 하지만 필자는 전두환이 최규하를 손보려 한 것이 아니라 정승화가 최규하를 손보기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소장에 있는 최규하 관련내용은 정승화보다 전두환이 먼저 알았다. 그런데도 전두환은 최규하를 조사하지 않았다. 반면 합수부가 작성한 기소장 내용을 뒤늦게 살펴본 정승화가 최규하를 조사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최규하 손보기를 전두환이 시도한 게 아니라 정승화가 시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시는 정승화의 시대였다. 정승화 위에는 오직 최규하 한 사람만 있었다. 정승화는 그의 자서전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 권력과 권한은 다르다고 했다. 박정희에게는 권한과 권력이 다 쥐어져 있었지만, 별 지지기반이 없는 최규하에게는 권한만 있었고, 물리력을 갖춘 권력은 전두환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당시 누가 보아도 물리력을 갖춘 권력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에게 있었다. 최규하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하라는 것은 차후 그가 하는 일에 최규하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손보기였을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규하만 고분고분 해지면 사실상 정승화의 독재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활활 타오르고 있던 정승화의 불꽃에 김재규는 돌연히 찬물을 끼얹었다. 12월 8일, ‘김재규내란음모사건’ 제2회 공판에서 김재규는 정승화가 자기의 범행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협조했다고 말했다.
검찰관: 만일 정승화 총장이 피고인의 의도에 불응했더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김재규: 불응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의 상황은 모든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10.26일 밤 B-2벙커에서 취해졌던 상황처리와 국방부에서의 분위기가 김재규 천하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김재규가 11월 8일에 했던 진술과 맥을 같이 한다. “정승화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뜻을 받들었다. 육본 벙커에서 정승화는 부대출동 등 중요한 상황처리를 했다. 국방장관이 와 있는데도 정승화는 나에게는 보고 및 의논을 하면서도 국방장관은 돌려놓았다. 이는 국방장관은 안중에도 없고, 나를 받들고 있다는 뜻이었다.”이어서 12월 10일에 열린 제3차 공판에서 김재규 변호인 김정두는 그의 분수를 한참 넘는 참으로 희한한 발언을 했다. 첫째, 정승화는 시해사건과 무관하고, 둘째 김재규를 선처하는 것이 계엄사령관의 내심이라는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129-130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장황하게 기술돼 있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보고 합수부 젊은 장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승화를 연행하지 않고서는 김재규에 대한 재판을 공정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정승화를 가만 두고서는 김재규가 민주화투사로 각색되어 방면될 것이며, 향후 정국은 재야세력, 김재규, 정승화가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를 연행하여 조사하자고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미루어 왔다. 그러다가 최종수사결과를 발표한 12월 6일, 전두환은 실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연행조사하자” 이는 김재규와 정승화의 심복들이 이끄는 수도권 정예부대들과의 전투행위까지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래서 보안과 속도가 생명이었다. 12월 6일은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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