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재규는 왜 대통령을 시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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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13 조회20,6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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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정승화의 천하
1. 김재규는 왜 대통령을 시해했나?
더러는 김재규가 차지철의 횡포에 화가 나서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질렀다면 어째서 미리부터 육군총장을 시해현장 부근에 불러다 대기시켜 놓았으며, 아끼는 부하들에게 사전명령을 내려 7명의 경호원들까지 살해하라고 준비를 시켰겠는가?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소요사태 수습에 대한 그의 무능함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본인 및 형제들의 비위가 대통령에게 노출되어 곧 있을 인사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차지철로부터 늘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이 차지철을 편애하고 있는 점 등의 감정적 차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런 처지가 급기야는 대통령을 시해하고 그 자신이 정권을 잡으려는 독한 마음으로 비화되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10월 27일, 김재규는 수사관 앞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본인은 76년12월4일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년 4월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해 불안을 느꼈다. 10월 19일,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 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학봉은 김재규와 잘 아는 사이였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서 함께 근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학봉은 41세였지만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김재규가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필기를 하지 않고 옛날 상사와 부하 사이의 대화인 것처럼 꾸며 안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필기를 일체 하지 않고 머리에만 입력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매우 허심탄회하게 진전됐다.
이학봉: 왜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김재규: 내 원대한 꿈이 앞섰다.
이학봉: 부장님은 박대통령이 살아 계실 때 인정도 받고 빛이 나는 것이지 박대통령이 돌아가시면 부장님의 입지도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재규: 모두가 나에게 절절 매고 따르기에 거사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이학봉: 이번 거사에 동원될 부대는 어느 부대였습니까?
김재규: 정승화가 내편이라 그런 건 염려하지 않았다.
이학봉: 대통령을 시해하려면 누구를 시키던지 하시지 왜 부장님의 손에 직접 피를 뭍이셨습니까? 부장님이 직접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중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시려구요?
김재규: 나의 심복인 안전국장 김근수를 시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으로 다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동안 전두환으로부터 자주 전화가 왔다.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텐데 빨리 알아내라는 전화였다. 그만큼 초조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김재규는 전두환을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학봉은 “이유만 정당하면 금방이라도 만나 뵙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유를 어떻게 전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이에 김재규는“지금 곧바로 혁명을 해야 한다. 시간을 지체할 겨를이 없다. 매우 안타깝다. 빨리 만나야 한다”며 시간을 재촉했다. 이때부터 3단계 혁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11월 8일. 김재규는 구체적인 “3단계 혁명 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유 정교하게 진술됐다.
나의 분신 같은 심복이 있다. 그는 중정의 안전국장 김근수다. 계엄이 선포되면 그 즉시 중정으로 가서 김근수에게 나의 의도와 범행내용을 실토하고 그에게 임무를 주려 했다. 현장에 남아 있을 궁정동 국정원 요원들을 연행,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현장 만 조사케 한 후, 현장증거를 인멸케 한 후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나의 범행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 채,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한다. 현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한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내가 되고,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검찰부와 혁명대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처단케 한다.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내가 정보부장으로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본인은 일약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어서 11월 17일 김재규는 그의“3단계 혁명계획”을 더 자세하게 털어놓았다.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 하면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골몰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그를 현장목격자요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 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이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위원회로 전환시켜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단 시일 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기존 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여 혁명위원회에는 사령관급 이상의 육군 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 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재경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위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들은 비상임위원으로 구성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 감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 감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 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 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안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함으로써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진술 끝)
이상과 같은 혁명계획에 따르면 김재규는 제2단계까지 성공한 것이다. 김재규의 군맥은 대단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육군총장이 된 사람,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서 그 후 줄곧 김재규의 심복으로 알려졌던 사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이었다. 이처럼 당시 김재규는 사실상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들이 서로 자주 만나 시국을 의논하고 의기를 투합했던 사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맥이라면 쿠데타는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2단계까지는 성공한 계획이 어째서 실패하게 됐는가? 이에 대해 김재규는 같은 날 이렇게 털어놓았다,
다 된 밥에 김계원이 배신을 했다. 아쉽다. 그러나 정승화는 배신하지 않고 나의 뜻을 받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육본 벙커에서 정승화는 부대출동 등 중요한 상황처리를 했다. 국방장관이 와 있는데도 정승화는 나에게는 보고 및 의논을 하면서도 국방장관은 돌려놓았다. 이는 국방장관은 안중에도 없고, 나를 받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정승화가 말을 안 들으면 쏘아 죽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백이 나오자 합수부는 비로소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학봉 수사국장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정승화의 구속수사를 건의했다.“김재규가 검찰로 넘어가기 전, 우리 손 안에 있을 때 정승화를 연행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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