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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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2:25 조회13,3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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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록으로 본
다큐멘터리 역사책 압축본
12.12와 5.18
(상,하)
머리말
역사는 어제의 집합체다. 선진국 사람들은 어제의 잘못을 내일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제로부터 교훈과 지혜를 뽑아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의 잘못이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를 처벌한 것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전자에서는 과학적 진실이 발굴되고 지혜와 교훈이 도출되지만, 후자에서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진실이 묻히거나 왜곡되고 그래서 교훈과 지혜가 도출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과거의 반복(replica of the past)이었던 것이다. 4색 당파 싸움에서 노론이 득세하면 노론이 역사를 썼고, 소론이 득세하면 소론이 역사를 썼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지식들은 많이 왜곡된 것들일 수 있다. 바로 이런 메커니즘으로 쓰인 부관참시의 역사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역사요, 12.12와 5.18에 대한 역사인 것이다.
이승만은 콧대 높은 미국사람들과 두뇌싸움을 하면서 남한까지를 공산화시키려는 소련의 야욕을 차단하고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및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한 인물이요, 당시의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학력이 가장 화려한 자랑스러운 지도자였다.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는 1948년 7월 17일에 3권 분립주의, 대통령중심제의 행정부, 단원제 국회, 농지개혁, 주요 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안을 공포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국회 재석의원 196명 중 180명이라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표를 획득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 때 이승만에 사사건건 대결했던 김구의 표는 겨우 16표였다. 이것이 1948년을 살았던 국민의 인식이었다. 그런데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이승만은 친일파의 앞잡이였고, 독재자였으며 그가 세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더러운 정권이라며 증오하면서 김구를 최고의 존경하는 인물이라 한다. 좌파가 뒤집어놓은 반역의 역사인 것이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두 개의 역사관이 존재한다. 3공화국 시대를 살았던 일반국민은 그를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를 살지 않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그를 독재자라 한다. 3공의 시대를 20세로부터 38세까지 살았던 필자는 박정희를 예측이 가는 엄격한 지도자요 애국자라고 생각했다. 독재자는 자기의 일신만을 위해 김정일처럼 주민을 혹독하게 학대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대부분의 국민에게 무한한 능력을 가진 인자한 아버지요 국민을 위해 잠 못 이루며 노심초사하던 애국자였다. 능력은 없으면서 오직 권력에만 눈이 멀었던 건달출신 정치꾼들과 북한의 대남사업에 놀아난 불순한 오열들이 야합하여 ‘민주화’라는 달콤한 언어전술을 구사하면서 국민을 선동하기 위해 그를 독재자로 매도했을 뿐이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오열들과 야합을 했던 것이다.
6공은 민주화로 위장된 좌익세력이 우익세력을 무너뜨리는데 협력했던 허수아비 정권이었다. 이때를 타서 기세를 잡은 386주사파를 포함한 좌익세력은 조-중-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언론들을 이용하여 국가를 중흥시켜온 군사정권을 군사독재라 선동하면서 민주화만이 대세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유일한 희망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한 역사를 뒤집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면 민족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새로운 역사책들을 홍수처럼 쏟아냈다. 2001년 8월 전교조는‘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라는 통일교욱지침서를 냈다. 표지에는 모자를 쓴 인민군이 가운데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주위를 남한의 어른 어린이들이 꽃술처럼 받치고 있다. 인민군이 중심이 된 통일사회가 영상화돼 있는 것이다.“학생들에게 6.25가 북침인가 남침인가 따지지 말게 하라, 북침이라는 이론도 많다. 사진과 비디오를 많이 구해서 전쟁의 참혹상을 가르쳐라. 그런데 이런 전쟁을 일으키는 존재는 오직 미국 하나뿐이다. 미국은 인류의 적이자 우리의 적이다. 그 다음의 적은 미국을 숭상하는 친미 사대주의 기득권 부자들이다. 여러분, 보세요. 아이스크림은 남한 말, 어름 보숭이는 북한말, 운동화는 남한 말 헝겊신은 북한 말, 어느 말에 민족의 얼이 있나요?”“북한 말이오”역사도 바뀌고 사상이 바뀌고 있는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 동안 필자는 오직 과학사회를 향한 제도개선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필자는 전두환 시대에 중령-대령으로 국방연구원에 있으면서 국방개혁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 싸우면서 청춘을 보냈고, 역사바로세우기 굿판으로 시끄럽던 1990년대에는 미국에서 돌아와 군사평론과 시스템을 통한 사회경영에 대한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매우 바쁜 생활을 했다. 그래서 필자역시 세간에 떠도는 역사의 일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었다.“전두환은 죄 없고 학자풍의 정승화 총장을 12.12 쿠데타를 통해 체포하여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며 억울한 죄를 씌웠다. 5.17로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인사들을 밤중에 잡아 가두고, 그 날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민주화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 후 무능한 최규하 정부를 넘어트리고 정권을 잡았다. 이 모두가 사전에 계획된 집권 시나리오에 의해 계획적으로 실행됐다.”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만 해도 필자는 김대중이 훌륭한 사람이고, 전두환은 나쁜 사람인 것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햇볕정책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추진하는 대북정책이 궤를 일탈하고 도를 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정신이 들어 김대중과 임동원의 정체를 분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필자는 1999년 중반부터 이 두 사람을 대남사업 전위대요 빨치산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민운동을 조직했고,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가했다. 옛날에는 정부가 좌익을 잡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김대중 시절에는 대통령 자신이 김정일에 충성하는 좌익이었다. 바로 여기에 김대중과 맞서 좌익과 싸우는 민간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이 심어놓고 북이 지휘하는 위장세력과의 전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며, 역사를 바로 잡는 일 역시 그만큼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적화통일의 일환으로 저들은 민족과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는 것을 선동하기 위해 역사 뒤집기 사업에 몰두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더러운 정권이라 정의했다. 김일성이 보낸 간첩 성시백에 놀아나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가 북한 정권 수립에 찬조연설까지 해주었던 김구는 위대한 통일운동가이고, 김일성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은 친일 매국노라 정의했다. 6.25 때 미국만 참전하지 않았다면 통일이 됐을 것이고,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만 아니었다 해도 통일이 됐을 텐데 미국이 원수고요 맥아더가 원수라며 인천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의 대상으로 정했다. 빨치산이 제주 군경가족을 무참한 방법으로 살해했던 제주 4.3사건도 민주화운동으로 둔갑했고, 7명의 경찰에 신나를 부어 불에 태워 죽인 부산 동의대사건도 민주화운동으로 등극했다. 이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12.12와 5.18 역시 이런 식으로 뒤집혔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5년에 걸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그것도 5공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작성된 것들을 가지고 분석을 했다. 그 결과 2008년 10월, 총4권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역사책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펴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을 통해 1980년의 역적이 1997년에 충신이 되었고, 1980년의 전의 충신이 1997년에 역적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소신이며, 이는 국가가 북한에 흡수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바로세우기재판은 곧 인민재판이었던 것이다.
1980년, 한국의 법관들은 정승화에게 내란방조죄를 선고했다.“김재규가 범인인줄 알면서도 기회주의적 발상으로 김재규의 범죄를 은닉하고 김재규의 뜻에 따라 국방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동원을 월권적으로 주도하면서까지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했다”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김대중에게도 내란음모죄를 선고했다. “80년5월의 학원소요사태는 김대중이 10.26 이후의 국가체제 공백기를 악용하여 북한 측 불순분자들과 연합하여 최규하 정권을 무너트리고 정권찬탈 목적으로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라는 것이다. 1980년의 법관들은 5.18광주사건을 반정부 폭동으로 규정했다.“5.18은 김대중으로부터 사주와 자금을 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 등이 자금을 살포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유발하고, 홍남순 김성용 등 반체제 인물들이 이에 편승하여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과도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폭도들을 더욱 선동하여 방화, 파괴, 살인, 강도 등의 행위를 저질러 광주를 무정부사태로 만들고 계엄군에 총격까지 가한 폭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1995년까지 16년간 정사로 기록돼 왔다.
하지만 1987년부터 세상의 주도권은 민주화세력으로 위장된 좌익세력에 넘어갔다. 북한의 대남사업에 파견된 간첩들과 정권에 눈이 어두운 정치꾼들, 남한에 살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외치도록 훈련된 386주사파 학생들이 노동자들을 선동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전국에 민주화 돌풍을 일으켜 전국을 이성 잃은 광란의 사회로 몰아갔다. 386주사파의 숙주가 된 김영삼이 민주화의 영웅이요 화신이 되고 싶다는 욕심에 이들에 영합하고 꼭두각시가 되어 저들의 뜻대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지휘했다. 그는 노태우 정권으로 편입하여 당시 민주화세력들이 주창했던“5공청산”의 5자도 꺼내지 않겠다면서 노태우의 마음을 샀고 노태우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됐지만 배은망덕하게도 노태우를 토사구팽했다. 인기영합에 감이 빠르다는 그는 광주사람들의 인심을 사느라 객기를 부렸다.“12.12는 쿠데타적 사건이지만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기자”는 말을 하여 박수를 받았고, 검찰은 그의 말을 받드느라 “12.12는 군사반란이지만 성공한 쿠데타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는 아부성 결론을 내놓았다. 이로써 기존의 역사는 그 대로 지속되는 듯 했다. 죄는 있지만 처벌은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변이 발생했다.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하자 사회는 들끓었고, 이에 중국에 가 있던 김대중이 제발 절여 10월 27일,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고 선수를 쳤다. 이에 국민은 탄압받는 김대중이 20억을 받았다면 김영삼은 도대체 얼마를 받았느냐며 화살을 김영삼에 돌렸다. 김영삼은 이런 막다른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노태우와 전두환을 구속하라 했다. 김영삼에 집중됐던 국민의 관심은 한 순간에 전두환-노태우로 넘어갔다. 결국 노태우-전두환은 김영삼이 달아나기 위해 악용된 희생물이 된 것이다. 김영삼이 말을 바꾸자 권력의 시녀라는 검찰은 또 법해석을 바꾸고 사실을 왜곡했다. 한국의 국회와 법관들은 헌법이 금지시킨 소급입법을 만들고 그래도 공소시한이 걸리자 12.12로부터 5.18에 이르기까지 6개월 동안의 기간이 다단계 쿠데타 기간이었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조작해내서 전두환 등에게 중형을 씌웠다.
1996년의 법관들은 헌법이 명시한 일사부재리 원칙을 무시하고 정승화와 5.18 광주사건 모두에 대해 재심절차 없이 다시 재판했다. 이들에 의해 김대중은 민주화의 화신으로 등극했고, 전두환은 무력으로 국권을 찬탈한 반란수괴요 광주시민을 학살한 내란수괴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997년 4월 17일(96도3376) 대법원은 이런 요지의 판결문을 냈다. “5⋅18은 전두환 일당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내란을 목적으로 광주학살을 자행하였다.” 6개월에 걸친 다단계쿠데타였다는 것이다. 쿠데타 하는 사람이 12.12에 겨우 수사관 7명을 정승화에게 보내 서빙고로 가자고 졸랐으며, 전두환이 대통령에게 가서 재가를 해 달라고 앙청했으며, 대통령이 국방장관이 오면 결제해준가는 말을 듣고, 9시간 동안이나 숨어 다니던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 앞에 나타날 때까지 국방장관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세상에 이토록 희한한 쿠데타는 오직 한국에만 있고, 역사바로세우기 판검사들의 머리에만 있는 것이다.
1995년에 국회에서 통과된 5.18특별법은 연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타협과 절충에 의해 만들어 낸 정치물이다. 역사를 정치인이 쓰는 나라라면 독재국가이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닐 것이다. 특별법 제정도 역사심판의 대상이 되고 재판부의 판결문도 역사심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은 광활한 사회 분야 속에서 극히 좁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이 속에 사는 검사들과 법관들은 역사를 쓸 만큼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역사를 조명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시대에 영합하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고, 분석력과 시각에 제한이 있는 법관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있는 극히 일부의 법관들이 시간에 쫓기면서, 법정에서 쓴 역사를 진실한 역사요 완전한 역사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 자체가 역사의 연구 대상이지, 역사의 저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기록을 가지고 판검사들이 몇 개월이라는 단기간에 걸쳐 분석한 결론과 석-박사 과정에서 분석학을 전공으로 한 필자가 5년여에 걸쳐 분석한 결론이 정 반대다. 누가 쓴 역사가 올바른 역사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12.12와 5.18에 대한 역사가 날조되고 왜곡됐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4권으로 된 역사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제까지 속아온 것에 대해 전율을 느낀다고 호소해 왔다. 본서는 보다 많은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4권의 책을 2권으로 압축한 것이다. 이 압축된 2권의 책과 4권의 총서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질 것이다. 4권의 총서가 없었다면 이 압축본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압축본을 읽은 독자는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4권의 총서를 읽고 싶어 할 것이다. 이 책은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다. 역사의 주인공들이 현재 살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시각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당대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잡지 못한 역사는 후손들도 잡지 못한다. 그래서 틀린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야 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인 것이며 이는 국민에 지워진 4대 의무보다 천배 만배 더 중요한 의무일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노력들에 촉매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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