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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2.12의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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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1:57 조회15,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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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2.12의 마감

노재현 국방장관은 국방장관의 직무를 스스로 포기한 채 최규하 대통령의 출두명령을 거부하고 새벽 4시까지 계속 도망만 다녔다. 육군총장 직을 대리하는 윤성민 참모차장은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육군본부 지휘부를 수경사로 옮겨 장태완 등 정승화-김재규 군벌과 한 편이 되어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들에게 대통령은 더 이상 군의 통수권자가 아니었고, 오직 정승화에 대한 충성심만 있었다. 국가의 지휘체계 전체가 마비된 상태였던 것이다. 윤성민은 역사바로세우기재판 법정에서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를 대통령에 보고해야 하니 대통령을 바꾸어 달라고 했는데도 최광수 실장이 바꾸어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바꾸어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1995년 12월 19일, 서울지검1032호실에서 최광수 실장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했을 리 만무하다고 진술했다. 윤성민 차장은 신현확 총리에게도 보고를 했다고 하지만 신총리 역시 그런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12월 12일 밤과 13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최규하 대통령은 이런 군벌들의 알력과 병력이동 상황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오직 한 사람, 대통령의 호출명령에 불복하고 여기저기로 숨어 다닌 노재현 국방장관이 나타나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6명의 장군들이 최규하를 “대통령 각하”라 부르면서 정승화 연행에 대해 시급히 재가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던 그 시각에, 윤성민, 장태완 등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은 대통령을 무시한 채 부대를 출동시켰다. 대통령이 까맣게 모르고 있는 사이에 정승화 계열의 장군들은 무력으로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 했고, 전차로 합수부를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하려 했으며, 급기야는 실제 발포 명령을 내리고 공격대형까지 갖추어 진격함으로써 청와대-경복궁-자하문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려 했다. 


이런 사태가 계속 진행되면 국민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며 사태가 여기에 이르게 되면 공격에 나선 군벌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내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되면 김재규가 일으킨 반역이 성공하게 되고, 국가는 또 다른 군사혁명이 지배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도 역사바로세우기 법관들은 정승화 군벌들의 모든 행위가 정당한 것이고, 소위 신군부가 행한 모든 조치들은 반란행위라고 판결하였다. 검사들과 판사들은 이들을 신군부라 불렀지만 이들이 어째서 신군부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군부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의외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이 간첩들에게 내린 “김일성 비밀교시집” 의하면 1979년 12월 20일 김일성은 중앙당 확대간부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교시를 내렸다.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대전복작전의 큰 일각을 맡고 있는 합수부에는 이 엄청난 국가전복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장군이라면 지휘공백 사태에 직면하여 국가를 보위할 꾀와 용기를 발휘했어야 했다. 지휘권이 완전히 실종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누군가의 지혜와 논리와 정의감이 필요했다. 서열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이 위기를 극복하는 시간대였던 것이다. 다급해진 이 순간에 전두환이 나섰다. 그리고 3성장군들을 포함한 장군들이 그를 밀어주었다. 11시 30분, 전두환은 드디어 장태완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당시 계엄공고 제5호 제1항에는 반란죄에 관한 수사관할권이 합수부에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합수부에는 병력이 없었다. 수사관들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수경사로 가서 펄펄 뛰는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전두환은 그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는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에게 장태완을 반란의 현행범으로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동시에 합수부는 정승화 계열의 움직임을 국가전북 행위로 해석하고, 대전복작전 차원에서 특전사 1여단(박희도), 3여단(최세창), 5여단(장기오)에 출동해 달라고 요청했다. 밤 12시경이었다.   


박희도 1여단장은 밤 12시경에 여단본부에 도착했다. 가보니 부여단장은 육군본부로 상황을 파악하러 갔다가 수경사 헌병에게 체포돼 있었고, 여단에는 정병주가 보낸 특전사 부사령관인 이순길 등이 나와 병력 출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박희도는 1공수여단 4개 대대를 13일 00시 20분에 출동시켜 01시 30분경에 육군본부로 진출했다. 그러나 국방부를 점령하려던 박덕화 중령이 이끄는 제5대대는 국방부 청사 옥상에 배치된 방공포단 소속의 발칸포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았다. 발칸포 사격은 장태완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공수단원들이 산개하여 사격이 멈추기를 기다렸지만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에 공수대원들이 청사로 진입하여 옥상으로 올라가 발칸포를 진압했다. 13일 새벽 02시 경이었다. 이 때 합수부장의 요청에 의해 공수단은 국방부 청사를 수색하여 계단 밑, 어두운 곳에 은신하고 있던 국방장관을 찾아냈다. 새벽 3시 50분경이었다.


밤 12시, 전두환은 3공수여단장 최세창에 전화를 걸어 사태를 자세히 설명해 준 후 9공수여단을 출동시킨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고 대전복 진압군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하였다. 30경비단에 모였을 때부터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던 최세창은 특전사령관이 정승화와의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의해 병력을 출동시킨 사실을 감지하고 제5대대장 박종규 중령에게 정병주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라고 명했다. 박종규 중령은 체포조 10명을 대동하고 사령관실로 향했다. 박중령이 굳게 잠긴 문을 권총으로 쏘아 여는 순간, 안에서 총을 쏘아 박종규 등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에 체포조가 응사하면서 정병주가 부상을 입고, 김오랑 비서실장이 사망했으며, 결국 정병주는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최세창이 이끄는 3개 대대 병력은 13일 새벽 03시 30분경에 중앙청에 도달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장기오 역시 5공수 여단 2개 대대 병력을 인솔하고 효창운동장에 도착했다. 


사태의 진상을 추적하고 있던 황영시 및 노태우도 움직였다. 황영시 1군단장은 자기 휘하의 박희모 30사단장 및 이상규 제2기갑여단에, 9사단장 노태우는 29연대(연대장 이필섭)에 출동명령을 내려 당시의 저항군 진압에 나섰다. 이상규 여단장은 휘하의 제16전차대대(대대장 김호경 중령)를 중앙청으로 출동시켰다. 중앙청 도착시간은 13일 새벽 03시30분이었다, 이필섭 대령이 이끄는 29연대는 새벽 02시 30경에 부대를 출발하여 04시 30분경에 중앙청에 도착했다. 제30사단은 부대가 이리 저리 흩어져 있어 즉각 행동을 하지 못해 04시경에야 제90연대장인 송응섭 연대장이 겨우 2개 대대를 인솔하여 06시 30분경에 고려대에 도착했다.


그날 진급한 헌병단장 조홍은 연희동 식당에서 급히 돌아와 상황이 궁금하여 예전 상관이었던 차규헌 장군이 30경비단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차규헌 장군과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차규헌이 “나도 지금 궁금해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리로 오라”고 하여 30경비단장실로 갔다. 바로 이 때 장태완이 30경비단을 공격하겠다고 소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 그는 전두환으로부터 장태완을 체포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그는 ‘정당한 합수부의 수사업무’에 대해 장태완이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반란행위라고 해석하고 수경사에 있는 헌병 부단장인 신윤희에게 장태완을 체포하라 명령했다. 밤 9시경부터 장태완의 행동을 지켜본 장교들은 대부분 장태완의 정신 나간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일부 장교들은 신윤희에게 장태완에 대한 조치를 취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했다. 새벽 3시, 신윤희가 이끄는 체포조가 사령관실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20여명의 무장병력이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신윤희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4명의 체포조를 데리고 사령관실로 갔다. 체포조의 한 대위가 “손들어”하고 진입하자 장군 몇 사람이 “이 놈들 봐라”하고 권총을 빼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체포조 한용수 대위가 좌측 벽에 대고 위협사격을 했다. 때마침 접견실에 있던 하소곤 소장이 사령관실로 나오면서 그 총탄을 가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군쯤 돼가지고 권총을 빼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장군의 힘은 권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미디에서 나오는 것이다. 1996년 3월 25일 1심 제3회 공판정에서 당시 수경사헌병단 부단장이었던 신윤희(육사21기)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을 했다.


12월 12일 오후 7시반 경, 상황장교로부터 ‘우경윤 대령과 권정달 대령이 진급에 불만을 품고 총장을 납치했다 합니다. 5분대기조를 빨리 출동하라 합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단장도 안 계시는 상황 하에서 부하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내가 총장 공관으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APC 한 대, 트럭 한 대, 백차 한 대, 병력 30여 명을 이끌고 출동했다. 공관 앞에는 국방부 헌병대, 육군헌병대, 해병 헌병대, 본부사령 부대 등 여러 부대 병력이 혼재하고 있었으며 긴장감이 감돌았다. . .장태완 사령관은 얼른 보아도 술에 취해 있었고, 대단히 흥분된 상태에서 ‘여기 누가 지휘하는가’하고 그 지역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쳤다. 내가 뛰어 나가면서 ‘헌병단 부단장 신중령입니다. 제가 지휘합니다’라고 하자, 사령관은‘그래?’했다. 나는 이어서 출동한 5분 대기조 병력과 장비 현황에 대해 보고했다. 사령관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신중령, 내가 지금부터 명령한다. 저 안으로 즉시 공격해 들어가 안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불응하면 모조리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5개 공관 전부에 대해 체포하거나 사실하라는 상식 밖의 명령이었다. 그 안에는 헌병 성환옥 대령도 있고, 육군과 해병대 병력이 혼재해 있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은 참으로 황당했다. . . 9시 30분경, ‘전장교는 상황실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있어 상황실로 갔다. 전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장태완 사령관이 들어오더니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가지고 흥분되어 말을 잘 잇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30경비단에 전두환, 노태우, 장세동, 김진영 등이 모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발견즉시 사살하라고 말했다. 장태완은 33단에서 나온 장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소령과 대위가 손을 들었다. 이에 사령관은 ‘너희 단장은 반란자다, 앞으로 사살하는 거다. 알겠지?’이렇게 말했다. . 나는 사령관실에 윤성민 차장 등 육본 장군들이 와 있는 사실을 몰랐다. 사령관이 나를 찾는다 하기에 께름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에 사령관은 ‘신윤희도 한패다, 신윤희도 적이다, 사살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사령관 실에 갈 수가 없었다. 20-30분이 지난 후 사령관이 헌병단으로 직접 내려왔다. 헌병단 건물 입구에 “축 진급, 영전”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조흥 당장의 진급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령관은 건물이 떠나갈 만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조홍, 이 놈아가 무슨 놈의 장군이야 장군이” 하면서 현수막을 손수 찢어버렸다. 이어서 “신윤희 이놈아도 똑같은 놈이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정보과장실에 있었다. 이를 조홍 단장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전화선이 이미 끊겨 있었다.   


11시 30분경, 나의 직속상관인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으로부터 일반 전화로 사령관이 합수부의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전차, 장갑차 등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공격한다고 하는데 문제가 심각하니 사령관을 체포하고 다른 장군들은 무장을 해제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도 엄청난 명령이라 처음엔 굉장히 당황했다. 이때 수경사 인사참모 이진백 대령이 나를 만나자고 뛰어내려왔다. 나는 혹시 인사참모가 비밀을 알고 염탐하러 온 것으로 의심하고 부하에게 계속 자리에 없다하라 명했다. 나중에는 신랑이를 하는 소리가 나서 밖에 나가보니 인사참모와 나의 부하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모시고 정보과장 방으로 갔다. 최순호 과장이 있는 자리에서 이진백(이진삼 장군의 동생) 인사참모는 사령관이 제정신이 아니다, 전차 등으로 30단을 공격한다고 하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나라 망하겠다, 그러니 당신이 좀 손을 써야 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나를 떠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반발을 했다. 인사참모가 사령관을 설득해야지 왜 나더러 그런 일을 하라 시키느냐며 20분간 옥신각신한 후 강제로 내보냈다. 인사참모가 올라가자 곧바로 정보침모 박웅(육사17기) 대령이 왔다. 그 역시 인사참모와 같은 말을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날 텐데 헌병에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박웅 대령과도 옥신각신 싸운 후에 그를 올려 보냈다. 그만큼 나는 조홍 대령의 명령을 놓고 고민에 빠졌고, 두 대령들에게 신경질을 낼만큼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곧이어 전차대대장 치기준 중령이 왔다. 그는 나와 동기로 육사 21기다. 전차대대에는 4개 중대가 있는데 1개 중대는 사령부에 배속돼 있고, 1개 중대는 30단에 배속, 1개 중대는 33단에 배속되어 있고, 1개 중대만 자기가 예비대로 데리고 있다가 지금 사령관의 명에 따라 아스토리아 호텔 앞에 공격대기 상태로 전개해 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전차 중대가 30단을 공격하면 30단에 배속돼 있는 전차중대와 싸울 것이 아니냐, 부하들끼리 싸우게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으냐며 울먹였다. 참으로 기막힌 현상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령관의 명령을 듣는 체 하면서 시간을 끌면 무슨 수가 생기지 않겠는가 하고 조언해 주었다. 나는 조홍 단장의 명령을 받은 후 누구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를 놓고 군 생활을 오래 한 정보과장 최준위와 한동안 의논을 했다. 그리고 조홍 대령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그 이유는 사령관의 명령이 무모하고  위험하여 참모들을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따르려 하지 않았고, 내가 존경하는 우경윤 대령, 성환옥 대령, 최석립 중령 등 헌병 선배들이 합수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합수부의 연행 조치가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집행계획을 세우고 임무분담을 하였다. 임대식 중대장이 이끄는 20명은 본청 밖을 경계하도록 하고, 윤태이 대위가 이끄는 20명은 1층 출입문들을 장악하고, 한영수 대위가 이끄는 20명은 복도와 계단을 장악케 하고, 나머지 5명만 나를 따르라고 했다.


새벽 3시경, 나는 한영수 대위, 이재우 대위, 최순호 준위와 하사관 5명을 대동하고 사령부로 출동했다. 본관 건물에 다다르자 사령부 본부대장 편정휘 소령이 이끄는 수십 명의 병사들이 사령부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트러블이 생기면 안 되겠다 생각해서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사령부 경비를 헌병단에서 맡도록 명령받고 오는 길인데 너는 지시받은 게 없느냐’고 했더니 그는 ‘지시받은 게 있습니다, 병력을 철수하겠습니다’ 하면서 병력을 철수 시켰다. 사령관실로 들어가는데 장군들을 모시는 부관, 보좌관들 20여 명이 권총을 휴대하고 사령관실 앞에 모여들 있었다. 나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내 명령을 따라 달라며 나를 따르던 하사관 5명에게 임무를 주어 그들을 옆방으로 몰아넣었다. 그 사이에 이재우 대위, 한영수 대위, 최순호 준위가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손들어 하는 소리가 나고 총성이 한발 울렸다. 한 대위가 공포로 쏜 총이었다. 이 때 김기택 참모장이 ‘신중령, 총은 쏘지 마’ 하기에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응했다. 사령관을 모시고 내 방으로 와서 차를 대접하고 조홍 단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더니 잠시 누구와 이야기를 하더니 사령관을 즉시 서빙고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안내하라 하여 세단을 준비하여 내가 직접 모시고 서빙고로 갔다. 나머지 장군들은 내가 서빙고로 가서 없는 동안 부하들이 서빙고 분실로 모셔갔다.


검사는 내가 처음에는 사령관을 돕다가 시간이 가면서 합수부가 이길 것 같으니까 마음을 바꾸었다고도 하고, 당시 합수부측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판단하기에는 좀 이른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중령 정도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또한 합수부장이 그 막강한 계엄사령관을 체포했을 때에는 보고가 됐거나 정당한 절차에 따라 했을 것으로 당연히 생각을 했다. 나는 접촉하는 범위가 상당히 넓은 사람이었다. 12월 12일 이전에 수많은 동기생, 선후배들이 정승화에 대해 조사해야 한다고들 했다. 나도 동감이었다. 그래서 총장이 합수부에 연행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체포는 위법이 아니라 합법이요 당연한 처사였다고 생각했다. 장태완은 자서전인 ‘12.12쿠데타와 나’라는 책에서 나를 하나회라고 썼지만 나와 조홍단장은 하나회가 아니다. 당시 내 방에 와서 장태완을 손보라 했던 인사참모, 정보참모, 김진선 상황실장, 편정휘 소령 모두가 하나회가 아니다. 수경사 450명의 장교3들 중에서 장태완의 명령을 받고 집합한 사람은 겨우 60명이다. 당시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사령관의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진술 끝)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곧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던 장태완이었지만 체포조를 보자마자 순한 양이 되어 아무런 반항 없이 체포에 응했다. 새벽 03시 30분이었다. 이로써 정승화 계열의 무모한 행위들은 종말을 고하게 됐다. 역사바로세우기에서 윤성민은 참고인으로 법정에 나와 스스로를 적법한 지휘 선상에 있었다 했고, 전두환 등을 반란세력이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윤성민의 행적을 보면 그의 법정진술에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12월 13일 새벽 03시 40분, 윤성민 등 수경사령관실에 있던 장군들이 수경사 소속의 신윤희 헌병중령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후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어 갔다. 그리고 새벽 5시경, 윤성민 혼자만 따로 보안사령관실에 안내되었다. 그 곳에는 전두환,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 노태우가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윤성민에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군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였고, 윤성민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12월 24일 1군사령관이 되었고, 이어서 1980년 5월20일에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이어서 1981년 5월초에는 합참의장, 1982년 5월부터 86년 초까지는 역사상 최장수의 국방장관을 지냈다. 그 이후에도 석유개발공사 이사장, 대한방직협회회장, 현대정공 고문을 역임했다.


이는 그가 12.12의 정당성을 후에라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5공 시절에 이렇게 출세의 가도를 달려놓고 세월이 지나 언론들이 인민재판식으로 전두환에게 돌을 던지자,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그의 행적과 어울리지 않는 진술을 했다. 세태에 따라 입장을 바꾼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의 재판은 세태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진술한 바에 따라, 세태에 영합하는 판검사들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대목인 것이다. 군에는 지휘계통이 있고 서열도 있다. 육군만이 군이 아니다. 노재현 국방장관, 김용휴 국방차관,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부부장 서리, 문홍구 합참본부장 등은 육본 소속이 아니지만 육군을 지휘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고 서열도 윤성민보다 높은 사람들이다. 당시 정승화에 대한 의혹은 전군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전사회적으로도 확산돼 있었다. 이런 의혹을 합수부가 조사하지 않는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군 간부들도 매우 많았다. 윤성민보다 서열이 높고, 육군을 지휘할 수 있는 위의 간부들은 합수부의 연행 조치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정승화 계열의 반발에 쐐기를 박았다. 합수부가 ‘의심을 받고 있는 총장’을 조사하기 위해 연행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판검사들은 정승화-윤성민-장태완-정병주-이건영 등 당시 육군본부 지휘계통에 서있던 장군들을 정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고, 합수부 쪽 편을 든 장군들 소위 신군부 장군들을 반란군으로 못 박았다. 단지 윤성민이 계엄사령관을 대리하는 법률상의 계엄사령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들은 정승화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며, “감히 부하가 상관을 체포할 수 있느냐”는 단순한 논리를 내세워 정당한 법집행을 불법한 병력동원으로 방해한 사람들이다. 판검사들은 정승화를 체포하기 전에 노재현 장관의 사전 허락을 받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옳은 주장이 아니다. 필자는 전두환이 12.12. 오후 6시 30분에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가기로 하고, 30분 만인 7시에 곧바로 총장을 체포하라고 한 것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한다. 재가를 받은 다음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칫 기밀이 누출되어 재가 사실이 정승화에게 전달되고, 그렇게 되면 정승화가 자체 방어는 물론 전두환을 체포하기 위한 병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보안유출은 매우 위험한 사태를 유발하는 길이었다. 재가를 얻자마자 체포함으로써 정승화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으려 한 것은 군의 상식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간다.


더구나 전두환은 그 이전에 노재현 장관에게 정승화에 대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던졌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당시는 정승화와 노재현이 한 팀이 되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만일 이런 노재현에게 정식적으로 총장 연행에 대한 보고를 하고, 정승화와 한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노재현이 이를 부결함과 동시에 그 기밀을 정승화에 누설한다면, 정승화에 대한 수사는 백지화되고, 아울러 전두환의 인생은 끝장이 날 것이다. 이처럼 노재현에게 사전 허가를 받는 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나간 짓’이었을 것이다. 노재현의 사전허가를 받았어야 했다는 법관들의 판결은 전두환이 정신 나간 짓을 했어야 했다는 참으로 희극적인 판결로 해석된다.


총장연행에 대해 법률적으로 노재현에게 보고할 의무가 없었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법률적으로 따져 봐도 당시 육군본부에는 군법회의와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설치돼 있었지만 국방부에는 이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육군총장 정승화를 연행하기 위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으려면 바로 육군계엄군법회의 관할관인 정승화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했다. 이는 그야말로 코미디 같은 규정이었다. 그렇다고 국방장관으로부터 사전구속연장을 발부받을 수도 없었다. 국방장관은 군법회의의 관할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사전구속연장을 발부할 권한이 없었다. 정승화 연행에 관한 한, 상황적으로 살펴보나 법률적으로 살펴보나 합수부는 국방장관에게 사후보고 밖에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12.12사태가 종결된 다음 날인 12월 13일 오전, 노재현 국방장관은 특별담화를 통해 합수부의 조치를 정당화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하여 군수사기관이 체포하여 수사 중이다. 수도권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일부 병력이 증강 배치됐다.” 최규하 대통령 역시 12월 18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12.12사건을 정당한 사건인 것으로 갈무리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은 우리가 상상 못할 돌발사건이요 국가 중대사건이었다. 따라서 계엄군 수사당국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의혹이 있다면 누구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이렇게 당연한 합법조치를 범죄행위로 규정한 천인공노할 모략이요 인민재판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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