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태완의 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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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20 11:58 조회19,4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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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장태완은 수경사 전 참모를 상황실로 소집하여 공격명령과 사살명령을 내렸다.
30경비단에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장세동 등 몇몇 장교가 모여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고 반란을 모의하고 있으니 발견즉시 무조건 사살하라. 그리고 수경사 소속의 모든 전차를 사령부에 집결시켜 30경비단을 때려잡아라.
이어서 3군사령관에게 또 다시 전화를 걸어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을 한시라도 빨리 출동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이건영 사령관이 ‘장관의 승인을 받고 병력을 출동시켜주겠다’ 고 하자 장태완은 장관의 소재를 알 수가 없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빨리 출동명령을 내려 달라는 상식 밖의 요청을 했다. 이처럼 국방장관은 양쪽 진영 모두에서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밤 10시 30분경, 장태완이 이렇듯 열을 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육군본부 상황실에 있던 육군 지휘부가 수경사로 이동했다. 노재현의 말대로 수경사는 자체방어능력이 있는데다 목소리가 큰 장태완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 천주원 인사참모부장, 하소곤 작전참모부장, 황의철 정보참모부장, 최항석 교육참모부장, 안종훈 군수참모부장, 정형택 예비군참모부장, 김시봉 관리참모부장, 이정량 통신감, 신정수 민사군정감, 김진기 헌병감 등 정승화계열의 강경파 참모들이 모두 수경사로 옮겨갔다.
수경사에 도착한 윤성민은 장태완이 시키는 대로 변규수 육본보안대장, 수경사 보안대원 전원을 즉시 체포하여 감금했다. 이어서 장태완은 문홍구 합참본부장, 김진기 헌병감, 황원탁 총장수석부관과 합세하여 “정승화 구출”을 위한 작전을 모의했다. 합수부 수사분실을 전차로 공격하여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차장(長)들은 장태완의 무모하고 불법적인 이런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장태완과 김진기가 헌병 1개 소대를 동원하여 최규하 대통령을 수경사로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 김진기가 삼청동 대통령 공관부근에 나가 상황을 살피기까지 했지만 공관 경비가 강화된 것을 보고 계획을 포기했다. 이들은 무력으로 총리 공관을 습격하여 그 곳에 있는 최규하 대통령을 납치하여 자기들의 뜻대로 정승화 총장의 원상복구를 기도했던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의 법관들의 잣대대로 만일 총리공관에 대한 경비를 삼엄하게 하지 않았다면 이 때 최규하 대통령은 납치되었을 것이다. 역사바로세우기 법관들은 총리공관을 무장병력으로 삼엄하게 경비하는 것이 대통령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결했다. 법관들이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만화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바로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정승화 군벌의 무분별하고 파행적인 움직임을 파악한 김종환 합참의장과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차례로 수경사에 가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전화를 걸어 정승화의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조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개인적인 것이니, 병력 동원을 금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당시 연합사 상황실에 피신 중에 있던 노재현 국방장관도 김용휴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밤 11시경에 수경사에 가 있는 문홍구 합참본부장에 병력동원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수경사에 모여 있는 장군들이 병력동원을 협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절대로 병력을 동원하지 말라. 합수부의 총장 연행은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총장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장군들에게 흥분하지 말고 있으라 하라. 보안사령관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니 내일 아침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이 사려 깊은 지휘관의 말이다. 윤성민도 이렇게 생각했어야 했다. 사리가 이렇고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장태완의 난동은 계속되었다. 11시경, 그는 사령부에 있던 전 장교를 상황실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명했다.
30경비단장, 33경비단장, 헌병단장 등을 발견 즉시 체포-사살하라. 현재 30경비단에서 반란을 모의하는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니 발견 즉시 체포 또는 사살하라. 방송국 및 각 검문소에 병력을 증강하라. 모든 전차 및 대전차 유도탄(TOW), 3.5인치 로케트 등 모든 화포는 탄약상자를 개방하여 차량에 탑재하고 출동에 대기하라. 모든 야포는 경복궁을 조준하라.
이런 장태완의 행위는 그야말로 이성을 잃은 난동이었다. 장태완의 명령대로 실행이 되면 청와대와 경복궁 자하문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될 것이며 수천-수만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살상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장태완은 이것이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그의 자서전 “12.12쿠데타와 나”에 기술하고 있다. 175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경복궁 포격명령을 받은 구정희 야포단장은 사령관의 명령이니까 모든 포를 경복궁에 조준해 두겠지만 포격은 어렵다. 야포는 피아가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은 시가전에서는 무용지물이 아니냐, 더구나 30경비단을 목표로 사격을 하려면 관측사격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에는 광화문 일대가 쑥대밭이 되는 것은 물론 민간인 피해가 말도 못할 정도로 클 텐데 절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누워서 침 뱉기와 같은 부끄러운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자서전에 자랑처럼 쓴 것이다. 장태완은 소위 윗분들의 명령들에 아랑곳 하지 않고 30경비단과 합수부에 대한 공격명령을 고수했다. 1994년 6월 29일, 2군사령관을 끝으로 대장으로 예편한 김진선(육사19기)은 서울지검 최상관 검사 앞으로 12.12에 관한 진술서를 우송했다. 12.12 당시 그는 중령으로 수경사 작전처 보좌관이었다. 당시 수경사 작전참모는 박동원 대령으로 육사14기였다. 그 역시 하나회가 아니었다. 진술서에서 그는 하나회가 주요 보직을 대물림하고 진급에 특혜를 누리는 반면 비하나회인 자신은 진급 등에서 늘 불리한 입장에서 생활했고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했다. 12월 12일, 김진선은 수경사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당시 수경사 상황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소리는 서울로 오는 부대는 모두 사살하라, 육사출신은 모두 사살해야 한다, 육사출신의 지휘권은 모조리 박탈해야 한다, 33경비단장을 사살하라는 내용들이었다. 분위기가 육사와 비육사간에 전쟁이 붙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했다. 나는 아군끼리의 교전을 막아야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했다. ‘즉시 부대를 편성하여 30단을 공격하라’는 장태완 사령관의 명령은 국가를 멸망시키는 명령이며,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명령이었다고 생각하여 작전참모에게 건의하여 이를 막으려 노력했다.
밤 11시경, 윤성민 차장과 황영시는 앞으로 상호간 병력출동을 하지 말자는 데 합의했다. 또한 윤성민은 노재현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이희성 중앙정부부장 서리로부터 병력동원금지령을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윤성민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약속한 지 10분만인 밤 11시 10분경에 수도기계화사단장과 26사단장에 전화를 걸어 출동대기명령을 내린 것이다. 3군사령관 이건영 역시 거듭되는 장태완의 요청을 받아들여 밤 11시 30분경에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 두 사단은 명령만 내리면 불과 한 시간 이내에 서울에 올 수 있었다. 밤 12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제9공수 여단장 윤흥기 준장이 제5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출동했다. 그러나 26사단과 기계화사단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급증이 난 장태완은 윤성민에 가서 이렇게 항의했다. “육군 지휘부가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한 짓이 무어냐? 반란군과 대화하여 얻은 게 무어냐? 이제 수경사만으로 공격을 하겠다.”
밤 12시, 윤성민 참모차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이 막강한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에 출동준비명령을 내린데 이어 9공수여단이 서울로 진입하고 있는 파죽지세를 타고 장태완은 수경사 전 장병에 30단과 보안사를 전멸시키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전차를 비롯하여 전장병은 전투조로 편성하라. 목표는 30경비단과 보안사령부다. 공격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금 즉시 공격개시선으로 전개하라. 출발은 내가 선도한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편성한 다음, 전차포, TOW, 106미리 무반동총, 3.5인치 로켓포들로 양개목표에 대해 동시 집중 사격, 수백발의 포탄을 집중시킨 다음에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역모자들을 사살 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하라. 즉시 본 명령을 시달하고 출동을 대기하라.
이때가 되어서야 윤성민 차장이 장태완의 무모함을 깨닫고 만류하기 시작했고,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도 적극 나서서 만류했다. 이에 대해 장태완은 이렇게 반응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란 말이냐, 이제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나는 돌격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3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운 2천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그 일부를 공격개시선(Line of Departure)인 아스토리아 호텔 앞으로 전진배치시켰다.(장태완 자서전 186-8, 1993.9.9. ‘12.12사건 국정조사국방위원회 회의록 49쪽). 이는 정상적인 지휘가 아니며 매우 위험한 것으로 누군가가 강제로라도 제지해야만 할 대상이었다. 장태완은 어째서 이런 무모하고 치기어린 행동을 하였던가? 10.26 당시 그는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이었다. 참모부 차장에서 곧바로 그 막강하다는 수경사령관에 임명된 것이다. 수경사령관은 통상 참모부장을 마친 고참 부장급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런데 정승화는 신출내기 차장급에 있는 장태완을 파격적으로 수경사령관에 임명한 것이다. 그가 취임하던 11월 16일, 수경사 장교식당에서 가졌던 취임축하 리셉션에서 그는 이렇게 흥분했다.
나 같은 촌놈이 수경사령관이 된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수경사령관에 임명해준 정승화 총장에게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정총장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다. 정승화 총장을 위해여 건배~
수경사령관은 대통령을 수호하는 공화국 사령관이다. 눈을 떠도 감아도 오직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 그런 자리다. 당시 군의 공식 파티에서는 언제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건배!” 하거나 “대통령 각하를 위하여 건배!”를 했다. 그런데 장태완은 “정승화 총장을 위하여 건배!” 했다. 바로 이것이 당시의 시대 분위기였다. 대통령은 없고 오직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만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맹목적인 돌쇠였지 사려를 갖춘 장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궤도를 이탈한 장태완의 원맨쇼에 그의 부하들은 우려와 조소를 보냈다. 그의 명령에 따른 부하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소위 민주화 세상을 만났다고 일거에 영웅으로 둔갑하려 했지만 끝내 그는 영웅의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 역사바로세우기 판사들은 이렇게 궤도를 일탈한 장태완의 난동을 놓고 반란자들을 제압하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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