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적장에 놀아난 반역자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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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08-25 19:27 조회18,31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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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김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승만, 자료를 통해 검증하자
단독정부 수립 배경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따라 신탁통치문제와 한국의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설치됐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한 예비회담을 가졌고, 1946년 3월 20일 제1차 회담을 가졌다. 미국측 대표는 소장 A.V.아놀드, 소련측 대표는 중장 T.E.스티코프.
회담은 벽두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제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1945년의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과도기 정치로서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소련측 대표는 이를 트집 잡아 반탁을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측 대표는 의사표시의 자유원칙을 내걸고, 신탁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정부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UN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격돌했다. 미국은 선-정부수립· 후-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반면 소련은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 때는 이미 소련이 북한 김일성을 괴뢰로 한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 놓고 있었다. 1946.2.8에는 “북조선최고임시인민위원회”가 1947.2.22에는 “북조선최고인민위원회” 및 내각이 설치되어 이미 북한만의 단독정부가 설치돼 있었으며, 2년 후인 1948.4.29.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이 발표되었다.
참고로 당시 서울주재 소련영사였던 샤브신은 박헌영을 괴뢰로 건의했지만, KGB 담당 부수상이었던 베리아는 스탈린에게 “박헌영은 민족주의 성향이 농후하니 김일성이 좋다”는 강력한 건의를 했다.
결국 UN총회는 1948년 3월 31일 안에 UN 감시하의 한국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고, ,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 대표로 구성된 ‘UN한국임시위원단’을 발족시켰다. 동 위원단은 1948년 1월 초부터 서울에서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38선 이북으로는 소련군의 거부로 가지 못했다.
그 결과 ‘UN한국임시위원단’은 1948.2. 26일, 5월 10일 이내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국내에서는 좌·우익 대립이 날로 격화되었다. 우익진영도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승만파와 김구파였다.
김일성에 농락당한 김구
이승만은 국제정세에 밝아 소련의 야욕을 이해하고 있었다. 미국은 4년에 걸쳐 수십만 톤의 피를 흘려가며 일본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했지만, 소련은 항복하기 3일전, 패색이 완연해 있을 때,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으로 진주했다.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그야말로 날도둑이었다.
외국물을 먹은 식자라면 미소공동위원회가 돌아가는 상황만 지켜보아도 소련의 속셈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버드 석사, 프린스턴 박사, 윌슨 대통령의 제자였기도 했던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 소련의 야욕을 잘 읽고 있었다. 당시 세계의 모든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 만큼 학벌이 화려한 지도자는 없었다.
분석적 시각,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김구에게는 이런 게 형성돼 있지 않았다.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아는 것, 그가 내 건 것은 오직 ‘통일’ 이 하나 뿐이었다. 가슴에 아무리 뜨거운 애국심이 용광로처럼 불타오른다 해도 머리가 비어 있으면 적에 이용당하고 만다.
‘통일’ 하나만 외치면서 그리고 통일을 명분으로 그는 1948.5.10 선거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남북대표자연석회의’를 스스로 제의하여 김일성-소련 노선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가장 큰 이유는 소련이 반탁 노선을 걷는 이승만 및 한민당 등의 정당 단체들을 임시정부 구성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데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구가 ‘남북대표자연석회의’를 제의한 것은 이승만을 빼고 자기가 남한의 대표가 되겠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셈에 따라 김구는 1948.5.10에 총선거를 치르겠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1948. 4. 22. 평양에 도착했다. "내가 김일성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에 합의하지 못하면 나는 38선에서 자결할 것이다", 그가 평양에 가지 못하도록 부하들이 자동차 앞에서 우리를 깔아죽이고 가라 만류했지만 그는 담을 넘어 평양으로 가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먼저 외국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임수정부를 만들자”는 소련-김일성의 주장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결국 김구는 '남북조선정당사회지도자협의회'라는 멤버로 등록되어 김일성의 들러리를 서게 되었다. 이는 '남조선독립정부수립반대'를 위한 김일성의 계략임과 동시에 이승만과 김구를 동격으로 놓음으로써 김구를 이승만의 반대세력으로 갈라놓으려는 2중적인 포석이었다. 김구는 거기에 놀아난 것이다.
5.10선거: 김구는 서울-평양에서, 김달삼은 제주에서 방해했다!
1948.5.5, 남한으로 돌아 온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남조선단선반대전국위원회’를 만들어 단독선거를 적극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다. 1948년의 제주4.3사태는 5.10 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해 빨치산의 영웅(?) 김달삼이 일으킨 경찰 학살 사건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소련측 대표였던 스티코프의 비망록에는 1946년의 9.24파업(23만명 참가, 1200여명 검거), 10.1대구 폭동 그리고 1948년의 4.3사건 모두가 스티코프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군자금을 내려보내고, ‘폭력혁명사태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김구는 스티코프-김일성 노선에 서서 5.10 선거를 방해한 것이었다.
1948.5.10일!
인구비례로 북한의 국회의원 100석을 남겨두고 20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1948.5.31. 국회는 189 대 8 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17.일 유사 이래 최초의 민주헌법을 발표했고, 이 헌법에 따라 7.20. 이승만은 200명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김구는 겨우 16표를 얻었다. 당대의 인물은 당대의 사람들이 평가한다.
그리고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평소 안면이 있던 육군 소위 안두희가 쏜 총알 4발을 맞고 73세로 생을 마감했다.
단독정부에 찬성했다 돌아선 배신자 김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1946.6.3.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공식화되었다. 1947년8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체됐고, 한국문제는 UN으로 넘어갔다.
김구는 처음 이승만, 한민당과 함께 반탁을 했다.
1947년12월1일, 김구는 "미소공동위원회로도 안 되고, 소련은 이미 이북에 단독정권을 이미 만들어 놓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 있는가. 소련의 방해가 제거되기까지 북한의 의석을 남겨놓고 선거를 한다는 조건이라면 이박사의 단독정부론과 내 의견은 같은 것이다”라며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수립에 합의했다.
그 후 20일이 지난 12.22일, 김구는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박사가 단독정부를 하면 사실상 미군정이 연장된다.” “외국군 철수 후 UN 감사 하에 남북이 의논하여 과도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가 남한만이라도 먼저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5월 10일로 선거일을 결정했다.
이에 김구는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김규식 등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정치협상을 제안했고, 북한은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를 반대하는 남북 조선의 모든 사회단체 대표들과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한다.'는 회답을 보냈다.
김구는 김규식, 김붕준, 박헌영, 백남운, 엄항섭, 이극로, 조소앙, 허헌, 홍명희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이들 이외에도 남한에서는 41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396명이 연석회의에 참가했다. 이들 모두는 좌익이거나 색깔이 희미한 군소정당들이었다.
회담은 1948년 4월19일부터 이미 개최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남한의 박헌영과 백남운이 4월 21일에 남한정세를 보고했고, 김구는 22일에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축사를 했다. 그리고 남한의 이승만을 제외시킨 채, 스스로 남한의 제정당의 대표자격으로 외세의 철수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북한이 짜놓은 각본에 의한 것이었고, 북한의 유일한 우익 지도자 조만식도 참여하지 않은 엉터리였다.
북한에 놀아난 죄로 북한에서 영화로 놀림 받는 김구
아래는 당시 남로당 지하당 총책이었던 박갑동 선생의 증언이다(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1946.6.3일,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으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이라 천명했다. 1947년 8월 12일 해체되고, 한국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지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했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 한 것이다.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두 사람은 “단독정부는 미국고 이승만의 음모이므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 때 김구는 북한의 스케쥴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했다. 홍명희는 김구에게 ‘김구, 김구식 이름으로’ 먼저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하라 했다. 김구가 연석회의 제안을 보냈는데도 김일성이 무시했던 것은 순전히 각본에 의한 연극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9.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의 덕에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이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말을 믿고 북한을 다녀온 김구는 “양쪽에 다 단독정부가 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을 가진 듯 했다.
북한은 당시의 김구의 방북 대목을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 한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쇄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편 주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려가며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노동신문에서 놀림 받는 김구
1997년5월26일(월), 로동신문은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신념과 절개를 목숨바쳐 지킨 성시백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두고-”라는 제목으로 장장 2개면에 걸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실었다.
이하 로동신문의 글
1946년 11월11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달 호에 “20여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착”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정향명은 해방 전 독립운동 시기에 이국땅에서 부른 성시백동지의 가명이었다. 성시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근 반세기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나간 전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92년 12월에 성시백 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는 이름 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947년 정초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저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 . .
“장군님 말씀을 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싸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든 것만 같습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만나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 . ”
김구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이렇게 드리대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었다. . . . .
성시백 동지는 김구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하고 물었다.
“내가 버로 김일성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선생의 얼굴이 크나큰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실 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시었으니 기어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 . . . .
1950년6월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 동지를 사형장으로 끌어내었다. 성시백 동지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24시간 전이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끝까지 방해했고, 정치적 욕심 때문에 김일성에 농락당해 북한정권에 정통성 부여했다. 그는 문익환 목사처럼 통일을 빙자한 국가 반역자였다. 그는 꼿꼿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김구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다.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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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대통령님의 댓글
차기대통령 작성일김 구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