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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순 목사(9번째 여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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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9 18:03 조회13,2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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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순 목사(9번째 여성목사)
  395  2005-06-13



억압 받는 자를 위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도시산업선교위원회(산선)은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산선은 ‘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도활동’과 ‘노동하는 목회자 프로그램’을 통하여 노동자와 함께 노동함으로써 그들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질서를 익히고 교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산업사회와 교회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공장에서 노동을 함께한 후 공장을 교회로 삼아 수시로 드나들며 노동자들과 대화하여 협력자로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각 공장 노동자들 중 교회에 나가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평신도 활동을 전개하여 이들을 위한 교육과 그룹 활동, 평신도 지도자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엔지니어와 중간 관리자의 모임을 꾸리기도 하였다.

특히 1964년 이후에는 각 공장에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좌담회를 열어 교회가 어떻게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는지를 협의하고 때로는 노동조합에 협력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해 왔다.

초창기에는 개별 노동조합을 위한 프로그램,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교육 등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활동 보다 노사 간의 분규가 생겼을 때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인천산선)은 지난 1961년 4월, 인천 동지방 감리사이며 주안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던 조용구 목사와 인천 서지방 감리사이며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윤창덕 목사가 동일방직공업주식회사와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하면서 탄생하였다. 같은 해 9월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교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경험한 오명걸 선교사(조지 오글 목사)가 인천에 부임하고, 1962년 인천 동·서 양 지방회의에서 산업전도를 하기로 결의하면서 산업선교 활동은 인천 동·서 양 지역의 공식 사업이 되었다.

이후 1968년 도시산업선교회로 개칭하고 중부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도시산업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직접 공장에 다녀

인천지역 산업선교활동은 일반 교회의 선교와 달리 산업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목회자가 직접 공장에 뛰어들어 선교활동을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인천산선 직장 여성부 실무자로서 1966년 10월부터 동일방직에 위장취업하여 활동해온 조화순 목사(당시 인천산선 총무)는 1971년 15평짜리 목조 초가지붕 건물인 인천산선 회관에서 일꾼교회(당시 노동자교회)를 개척하여 동일방직의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백마교회(당시 광야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송현 산마루교회와 안산 밀알교회의 개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영세 주민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

1972년 조승혁 목사가 동일방직,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주식회사의 노사분규에 대한 배후 조종 혐의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는 등 산업선교 자체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인천산선은 노동자를 위한 산업선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을 지원하고 <민들레 선교원>을 개원하여 어린이, 노동자, 빈민을 위한 무료진료 활동과 신용조합 운영을 통하여 영세 주민과 노동자들의 권익과 생활개선을 위해 활동해 왔으며, 1996년 사회복지선교회(사회복지선교위원회)로 이름과 활동 방향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료관에서는 인천산선의 귀중한 사료를 선별, 등록하여 등록 목록(메타데이타)을 만들고 데이터베이스화하여 2006년부터 웹상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며, 공개된 사료는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와 민주화운동의 역사정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이인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http://archives.kdemocracy.or.kr/board/pds_monthlysaryo/view.asp?bid=pds_monthlysaryo&num=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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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발(足)이 권력에? 민중에!

70년대 산업선교, 조화순 목사

조화순(68) 목사는 70년대를 전후해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선교 과제 중 하나였던 산업선교의 최전선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노동운동이 유난히 치열했던 인천지역에서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총무직을 18년 가량 맡아 하면서, 그는 여러 차례 투옥을 당했고 ‘빨갱이’, ‘공산당’이라는 왜곡과 탄압을 받으며 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18년 동안 했던 노동운동과, 역시 18년 동안 했던 교회 목회를 되돌아보면서 “노동운동이 훨씬 성서적이고 기독교적이었다”고 고백한다. 노동운동은 몸으로 깨달은 예수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었다는 것, 그것이 조화순 목사의 신앙고백이자 인생고백이다.

“예수처럼” 살면 빨갱이?
조화순 목사가 산업선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6년이었다. 34세의 처녀 목회자로 경기도 시흥의 달월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당시 감리교 산업선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조지 오글 목사, 조승혁 목사 등에게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 실무자로 일할 것을 제안 받았던 것이다. 당시의 산업선교는 산업 ‘전도’에서 산업 ‘선교’로 탈바꿈되는 과도기적인 상황이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 산업현장으로 전도지를 들고 나갔던 초기의 산업전도에서, 전도란 전도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사건 등 삶의 전반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던 것이다. 즉, 영적인 구원 이전에 가난하고 핍박받는 노동자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사회구조적인 해방을 일구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회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신학적인 성찰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화순 목사는 “노동현장에 깊이 뿌리박는 선교를 하기 위해서” 6개월 동안 신분을 숨기고 노동자가 되는 산업선교 실무자 훈련을 받았다. 그가 취업했던 곳은 1천3백 명 가량의 노동자, 그 중에서 1천여 명이 여성 노동자인 인천의 동일방직 주식회사였다. 그 곳에서 조 목사는 “교회에서조차 소외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통을 처음으로 직면했다.

“나는 부잣집 딸이었기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삶이 어떤 건지 정말 몰랐어요. 세 끼 밥이 없는 거, 반찬으로 새우젓만 먹는 거,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각종 약병을 달고 사는 거…. 그뿐인가? 교회 가고 싶어도 일요일에도 작업해야 하니까 교회를 못 가는 거야. 그러면 교회에서는 주일성수 안 하면 구원 못 받는다고 그러고. 그러니 노동자들은 사회에서는 ‘공순이, 공돌이’ 취급받고 교회에서는 ‘구원 못 받는 사람’으로 내몰렸던 거지요. 그런 걸 같이 겪으면서 이건 뭔가 잘못됐다, 교회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거에요.”

조 목사는 노동자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 과도한 노동시간 때문에 주일성수조차 할 수 없는 상황,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정체감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여건 등 천민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 목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믿는다는 게 뭔가, 하고 자신에게 자꾸 물었다고 했다.



◇인천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초가 사무실(1971년).

“예수가 어떻게 살았어요?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 장애인들, 이런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 편에서 살았잖아. 그런데 교회가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선교를 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참 선교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맘놓고 안식일 지킬 수 있고, 맘놓고 일할 수 있고, 맘놓고 쉴 수 있는, 그런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지요.”

이러한 깨달음을 기반으로 조 목사가 시작한 것은 노동조합법에 대한 학습과 그것의 전파였다. 소위 말해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는 노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노동자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회사마다 대부분 회사측에 고용된 일부 ‘노동귀족’들의 어용노조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 목사가 추동해 내는 운동 에너지는 눈과 귀가 가리워져 있던 노동자들을 놀라운 속도로 변화시켰다. 자신의 생존에 대한 권리, 평등, 자유의 개념을 알아갔고,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 벌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가장 처절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분에 대해 눈을 뜨게 됐던 것이다.

노동자들이 의식화되어가면서, 조 목사가 이끄는 인천산선에서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전부가 참여하는 노동학교를 개최하기도 했고, 그러한 성과로 1972년에는 동일방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노동자가 지부장에 선출돼 여성집행부가 구성되는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 목사는 자신이 벌였던 운동을 “그저 내가 새롭게 깨달은 예수를 전한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동료가 부당해고를 당하면 같이 항의하고, 동료의 팔이 부러지면 같이 보상을 받아내는, 존엄한 인간으로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깨우친 것뿐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곧 예수처럼 사는 것을 의미했다. 조 목사는 예수처럼 사는 것이 요즘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구원의 메시지라고 말한다.

“시대에 따라서 구원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초대교회 때는 예수의 부활사건을 증언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구. 너희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했다, 그 말만 하면 잡혀가고 갖은 고초를 다 겪었으니까. 그런데 요사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얘기한다고 잡혀가지는 않아. 내가 안기부에 잡혀 갔을 때 그 사람들이 뭐라고 그랬는 줄 알어? 예수 부활 믿고 천당 간다는 얘기만 하래.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는 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 그건 하지 말라는 거야. ‘예수처럼’이라는 말 하면 빨갱이라구. 그러니까 부활신앙은 이미 웬만한 기독교인들은 다 받아들인 신앙이고, 예수처럼 사느냐의 문제, 그게 구원의 핵심인 거지.”

똥물세례와 구타, 구속의 나날들

사실 그랬다. 70년대 유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분야의 민주화 운동이 혹독하게 핍박당할 때, 노동운동 속에서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과 행동을 보여주었던 산업선교도 무사할 리 없었다. 정부는 공공연히 산업선교를 ‘사회주의체제를 획책하려는 불순세력’으로 매도했고, 홍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라는 책을 펴내 다량으로 살포하기도 했다. 그 책은 한 마디로 산업선교가 남미 해방신학에 기초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형식상 종교의 탈을 쓰고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자금과 지시지령으로 운영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모략이었다. 물론 정부의 폭력은 이 정도의 이념공격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노동 인권운동을 벌이던 해외 성직자들을 강제로 추방시켰고, 산업선교 기관의 실무자들을 감시, 연금, 투옥하는 등 직접적인 탄압을 벌였다.

◇조 목사는 산업선교뿐 아니라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도 크다. 사진은 국제관광문화 세미나에서 기생관광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모습.
그러나 산업선교 실무자들에 대한 탄압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벌이는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다. 동일방직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자주권을 찾게 되면서 회사측은 노동자들을 해고, 구금하는 등 온갖 흉포한 폭력으로 탄압했고, “때려잡자 조화순”이라는 구호 아래 조 목사를 협박하기도 했다. ‘빨갱이 조 목사’가 ‘공순이’들을 선동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 일명 ‘똥물사건’이다. 78년 2월에 있었던 이 사건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지부장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경찰의 묵인 아래 회사측이 직원을 사주해 당시의 노동조합 집행부 일행에게 똥물을 먹이고 온 몸에 바르고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산업선교회뿐 아니라 교계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집회와 성명서를 발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22일, 해고된 노동자들과 신·구교 단체들이 연합으로 기독교회관에서 열었던 기도회에서는 경찰들이 난입해 조화순 목사를 비롯한 목사들과 학생, 노동자를 폭행하고 강제 연행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조 목사가 같은 해 11월에 구속돼 형을 살았던 것도 동일방직의 똥물사건과 연관된 것이었다. 부산 YMCA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수난과 투쟁상황을 강연한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공갈 협박과 구타, 그리고 구속. 그러나 조 목사는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정말 사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너무나 분명한 고난과 핍박, 생존의 현장에서 예수를 만났고, 예수를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란다.
“동료 목사들이 조 목사 어떻구 저떻구 얘기하면 이런 얘기 많이 했어요. 나하고 자리를 1년만 바꿔보자. 목사님이 내 자리에 와 있으면 나같은 사람 된다. 나도 교회의 안일한 환경 속에 있었으면 당신하고 똑같은 사람 됐을 거다. 그런데 생존의 처절한 현장에서 남이야 굶든지 죽든지 신경 안 쓸 수 있는 목사가 몇이나 있겠냐구 말야.”

“너의 발이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조 목사가 얘기하는 것이 바로 “발의 신학”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 그 시대 시대마다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예수도 시대적인 환경이 어려웠지만, 예수가 어디 있었어? 가난한 갈릴리 지방에 있었잖아. 예루살렘에 안 있었어. 갈릴리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거야. 잘 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사느냐, 권력의 편에서 사느냐, 아니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 편에서 사느냐, 그게 중요한 거지.”

조 목사는 84년도에 인천산선을 떠나 시흥의 달월교회로 목회지를 옮겨 62세까지 시무했고, 지금은 강원도 장평에서 조용히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는 84년도 무렵에 이제는 의식을 개화시키는 목사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조직과 관리에 탁월한 노동운동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떠났더란다. 그리고 요사이 시대적인 사명, 즉 구원의 메시지는 ‘생명’이라고 말한다. 땅이 소외당하고 생명이 가장 천대받는 시대기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일이 교회가 할 일이라고.

조 목사는 유신체제 아래서 가장 핍박받는 노동자가 되었듯이, 지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가난한 시골의 한 일원이 되어 있다. ‘민주화 운동가’로서의 후광도 없이, 퇴직금처럼 얻는 명예직도 없이 말이다. 그 없음의 자리, 그 곳이 바로 조 목사의 발이 놓여 있는 곳이다.

곽성혜 기자 rullu@c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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